1920년 12월 27일, 의열단원 최수봉 의사가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는 용맹한 거사를 벌였습니다. 이 사건은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노와 조선 민족의 의기를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최수봉 의사는 어린 시절부터 일제의 식민지 행정과 학대를 목격하며 민족 의식을 키웠고, 숭실학교를 통해 독립 운동의 정신을 배우며 독립 운동에 몰두했습니다. 의열단원 김상윤과 이종암과 함께 밀양경찰서 폭파를 결심한 최수봉 의사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며 애국 정신을 빛내주었습니다.
의열단 은 부산경찰서 폭파 후 다시 의거의 대상으로 밀양경찰서를 택하였다. 이유는 김원봉 등 다수 단원들의 고향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청소년기 고향에서 일제 경찰의 만행을 지켜보고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 일본인 경찰간부는 물론 조선인 출신 하급 경찰관의 대민 학대와 일제에 부역하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분개가 충천하였을 것이다.이 같은 인간적인 감정과 함께, 국내에서 3·1혁명 열기가 점차 식어가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일제에는 여전히 조선민족의 의기가 살아 있음을, 동포들에게는 움츠리지 말고 항쟁의 투지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여 밀양경찰서 폭파 를 시도한 것이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밀양출신 의열단원 최수봉이었다. 1894년 3월 3일 밀양군 삼남면에서 태어나 마을에 있던 서당에서 한문과 신지식을 배우고, 1910년 사립 동화학교에 편입하였다. 이 학교에 다니던 2년 동안 전홍표 선생으로부터 나라사랑 정신과 역사 교육을 받았다. 1919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밀양에서도 3·1독립만세 시위가 여러 차례 전개되었다. 최수봉도 장터에 나가서 만세를 불렀다. 그 무렵 의열단원 김상윤을 만났다. 이듬해에는 역시 의열단원인 이종암을 만나, 셋이서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기로 뜻을 모았다. 최수봉 의사는 1921년 7월 8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제단에 생명을 바쳤다. 밀양청년회가 준비한 장례식을 일제는 막았고, 장례식을 준비한 관계자들을 잡아들여 조사하였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막은 것이다. 정부는 1963년 고인의 애국정신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 연구자는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파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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