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희 논설위원 한국은행이 지난 8월 말 내놓은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방안’ 보고서는 이후 공론장에서 꽤 파문을 일으켰다. 지난달 1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한은 대상 국정감사에서도 보고서를 둘러싼 질의와 응답이 이어져 마치 교육위원회 국
한국은행이 지난 8월 말 내놓은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방안’ 보고서는 이후 공론장에서 꽤 파문을 일으켰다. 지난달 1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한은 대상 국정감사에서도 보고서를 둘러싼 질의와 응답이 이어져 마치 교육위원회 국감장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얼핏 보기에 한은의 업무 범위에서 벗어난 사회 이슈를 다룬 것과 관련해 이창용 한은 총재를 향해 “출마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문제의 보고서는 입시경쟁이 사교육 부담, 저출생, 수도권 인구집중, 집값 상승 등 우리나라의 여러 사회문제를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이 보고서가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은 대안으로 내놓은 ‘대입 지역별 비례선발제’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인 입시제도를 건드린데다, 그 내용이 상위권대의 신입생을 지역별 학생 수에 비례해서 뽑아야 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은의 보고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안만이 아니다. 보고서는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주장하기 위해 여러 논거를 제시하는데, 특히 중요한 부분은 부모의 경제력과 학생 거주지역이 대학 진학률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대목이다. 보고서는 실증 분석 결과 2010년 소득 상위 20%와 하위 80% 간 상위권대 진학률 격차 중 75%는 학생 잠재력이 아닌 ‘부모 경제력 효과’의 결과라고 추정했다. 또한 2018년 서울과 비서울지역 간 서울대 진학률 격차 중 92%는 부모 경제력과 사교육 환경 등을 포괄하는 ‘거주지역 효과’에 기인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같은 잠재력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서도 부모가 부유하고 사교육 환경이 좋은 지역에 사는 학생일수록 상위권대에 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수치로 보여준 것이다.한은의 분석이 가지는 사회적 함의는 우리 교육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 이념 중 하나인 ‘능력주의’에 균열을 냈다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부모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는 봉건사회보다 우월하다고 인정되는 것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사다리를 타고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고, 즉 능력주의가 작동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다리의 대표적인 제도가 교육이다.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최대한 펼치고, 이를 통해 사회적 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명제다. 하지만 한은의 보고서는 우리 교육이 사회적 이동성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대물림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미국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 역시 미국의 대학 입시가 부유층에 유리하게 변해가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미국에서 상위 1% 가정 출신이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은 하위 20% 출신보다 77배 크다.
지역별 비례선발제가 입시제도의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하고 치밀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한은 보고서가 촉발시킨 ‘과연 한국의 능력주의는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대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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