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 망하라고 맹활약한 조선 제일의 친일파 친일파 일제_식민지배 조선귀족회 고종_퇴위 친일청산 김종성 기자
철종 임금의 부마인 박영효는 11세 나이로 부마가 됐을 당시 '끈 떨어진 연'과 비슷했다. 그가 세 살 많은 영혜옹주와 결혼해 왕실 사위가 된 것은 1872년 3월 30일이다. 에 표기된 음력 날짜는 고종 9년 2월 22일이다. '고종 9년'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장인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고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부마가 됐던 것이다.
그는 23세 때인 1884년에 김옥균과 함께 일으킨 갑신정변에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동학군 진압을 명분으로 일본군이 침투한 1894년에 귀국한 그는 이듬해인 1895년에 또다시 역모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있을 때인 1900년에는 고종의 아들인 의화군 이강을 왕으로 추대하는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로 결석재판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이처럼 '처가 망하라'며 친일 행보를 보였던 그가 고종 퇴위를 반대한 것은 이완용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의 윤해동 기고문은"이는 이완용과의 갈등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을사늑약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의 최고 파트너가 된 이완용과의 갈등 관계가 배경에 있었던 것이다.
또 1911년에 이완용에게는 은사공채 15만 원어치를 준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28만 원어치를 줬다. 이들은 은행에 예금되는 이 돈의 이자를 받아 곳간에 채웠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평안도와 경기도에서 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김연상이 1910년에 받은 월급은 50원이다. 이완용에게는 이 월급의 3000배, 박영효에게는 5600배가 일왕 하사금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박영효는 조선귀족회장이 되고, 이완용은 중추원 부의장이 됐다.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의장직은 총독부 정무총감이 겸했기 때문에, 중추원 부의장은 한국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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