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갑수
한국 친일파들의 정치적 생존력은 경이적이다. 그들이 섬기던 일본제국이 패망했는데도 거의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해방 직후에 그들을 겨냥한 민중항쟁이 대구와 제주와 여수·순천에서 일어났는데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김갑수는 지금의 헌법재판관인 헌법위원직도 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에 각각 역임했다. 또 독립운동가이자 진보 정치인인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를 확정한 주심 대법관이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한국 현대사에 남긴 족적이 꽤 큰 인물이다.김갑수는 일제 강점 2년 뒤인 1912년 3월 7일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935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한 그는 그해 8월 공주지방법원 판임관견습이 되고 11월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듬해 5월에는 사법관시보가 됐고, 대구지방법원에서 검사국 검사대리로 부역했다. 법원과 검찰이 분리되지 않은 시절이라 '법원 검사국 검사대리'라는 직책이 가능했다.
"단조로운 사건"을 다뤘든 비중 있는 사건을 다뤘든, 일제 통치 시스템의 최상부에서 한국인들을 사법적으로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거기다가 1935년부터 9년간 조선총독부의 녹봉으로 친일재산을 모았다. 그의 이름이 에 등재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일반적인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일본제국과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과도 제휴한다. 1945년에 출범한 이승만 정권하에서 법전편찬위원, 법무부 법무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 법무부 차관, 내무부 차관에 이어 대법관을 지낸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을 맞이한다.윤석열 정권이 검사 출신들을 중용하는 것과 달리, 이승만 정권은 판사 출신들을 중용했다. 1971년 8월 14일 자 '전관'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인재는 법원에서'라는 말이 유행했다면서, 대법관 백한성이"경무대의 호출 전화를 받고 이 대통령에게 불려가 그날로 내무부 장관 감투를 얻어 들고 얼떨떨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한다.그 뒤 대법관으로 옮겨간 김갑수는 47세 되던 해에 이승만 정권에 큰 공로를 세운다. 1959년 2월 27일 이승만의 정적인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 주임 대법관 2명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김갑수는 3심 선고 5개월 뒤인 1959년 7월 30일에는 조봉암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그로부터 17시간 뒤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김갑수가 깊숙이 관여한 정치 재판이 이처럼 비상식적인 사형집행으로 결말을 맺었으니, 그와 이승만 정권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직 판사이자 검사인 사람이 내무부 차관에 임명된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이처럼 그는 자신이 4·19의 성토 대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4·19 직후에 공직에 재차 도전한다. 은"1960년 7월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경기도 안성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됐다고 말한다. 4·19혁명으로 갈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고향 안성을 찾아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던 것이다.그는 제3공화국에서는 집권당 당료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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