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지의 고난과 치욕 김옥균 김옥균평전 김삼웅 기자
갑신정변 후 조선의 수구세력은 비열하고 일본 정부는 교활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비참한 망명생활을 하면서 신문보도나 사적인 채널을 통해 들은 두 나라의 처사에 긴 한숨을 쓸어내릴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그리고 거사에 실패한 데 대해 한없이 자책하였다.
이른바 '한성조약'으로 민씨정권과 일본은 갑신정변의 뒷수습을 했는데 조선은 일본에 손해배상을 하고 국서를 보내 사과키로 했다. 조선정부로 볼 때 남의 나라 정권을 절도하려 한 음모에 일본이 군사개입했으므로 일본을 응당 문책해야 할 일인데도 오히려 조선이 일본에 손해배상과 사과를 하라고 동의했으니 조선정부의 사대근성과 일본 정부의 교활성을 엿볼 수 있다. 일본정부는 조선정부로부터 이렇게 유리한 조약을 체결받고 대신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는 것은 묵인하겠다는 양해를 했다. 일본도 일본이려니와 외세에는 비굴 관대하고 세 나라 정적에는 잔인가혹한 조선정부가 가탄스럽기만 하다.
김옥균은 생명을 부지하기도 힘겨운 상황이 되었다. 모국에서는 끊임없이 암살자를 파견하고, 일본 정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존재를 최소화하려 들었다. 두 쪽에서 노리는 목표는 같았다. 다만 일본 정부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래 자국 안에서는 어느 정도 언론자유가 허용되고 있어서 여론의 동향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옥균은 일본정부의 비법적인 행위에 대하여 증오와 격분을 금치 못하면서 부득이 동 6월 3일 잠시 요코하마 해안거리에 있는 불란서인이 경영하는 여관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 여관은 불란서인이 경영하는 것이므로 일본 경찰이 직접 간섭하지는 못하리라고 김옥균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안 일본정부는 즉시 요코하마 불란서 영사의 동의를 얻어 김옥균을 다시 그곳으로부터 일본 영내를 영영 떠날 것을 강요하였다. 12> 연표, 앞의 책, , 426~42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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