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의사의 서울 한복판 시가전, 독립운동의 끝없는 용기

HISTORY 뉴스

김상옥 의사의 서울 한복판 시가전, 독립운동의 끝없는 용기
독립운동김상옥종로경찰서
  • 📰 OhmyNews_Korea
  • ⏱ Reading Time:
  • 75 sec. here
  • 9 min. at publisher
  • 📊 Quality Score:
  • News: 54%
  • Publisher: 51%

1923년 1월, 김상옥 의사는 서울 종로경찰서를 폭탄 공격하고 400명의 일경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그는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 가장 통쾌한 의열투쟁은 안중근의사의 이토처단, 윤봉길의사의 사라기와 처단, 그리고 김상옥 의사가 단신으로 왜경 400명과 서울 한복판에서 시가전 을 벌인 투쟁이 아닐까 싶다.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경, 서울 종로경찰서 에 폭탄이 떨어졌다. 폭탄의 성능이 약했던지 크게 폭파하지는 않았으나 유리창이 깨지고, 건물 앞을 지나던 기자 등 7명이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는 등 총독부는 혼비백산이 되었다. 투탄자가 누구인지, 행방이 묘연하였다. 서울의 한 복판에 자리잡은 종로경찰서 독립운동 가들에게는 총독부에 버금가는 원부였다. 황포탄 의거의 일원인 김익상을 잡아다 사형한 것도 그곳이었다. 의열단으로서는 마땅히 파괴해야 할 대상이었다. 3·1혁명 후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는 이른바 '문화정책'의 미명하에 무단통치를 자행하고, 만세시위로 수감된 시민·학생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한층 악명을 날렸다. 종로경찰서 투탄은 의열단과 임시정부의 합작품이었다.

임시정부 요인 이시영·이동휘·김구·조소앙 등은 1922년 11월 중순 조선총독과 고관을 암살하고 중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적임자로 의열단원 김상옥과 안흥한이 선정되었다. 스스로 지원한 것이다. 김상옥은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집이 가난하여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였지만 심지가 곧고 의협심이 강하여 청년시절부터 대한광복단에 들어가 활동하고, 3·1혁명 때는 손수 태극기를 만들어 북한산 정상에 꽂는 등 항일운동을 벌였다. 김상옥은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두루 만났다. 특히 김원봉의 항일정신에 감명을 받고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국내로 들어오면서, 거사용으로 의열단에서 준비한 권총 3정과 실탄 500발, 살포용 을 휴대하고 1922년 겨울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밤중에 걸어서 건넜다. 그리고 경의선 간이역에서 석탄수송차에 몸을 숨기고 12월 1일 일산역에서 하차, 서울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거사용 폭탄은 의열단원을 통해 별도로 전달받기로 약조되었다. 김상옥은 총독 사이토가 업무차 도쿄로 간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이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삼고 그가 기차를 타게되는 서울역을 은밀히 답사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렸다. 1월 17일 저녁, 이날도 서울역사와 주변을 돌아보고 은신처에서 막 잠이들려고 할 때 문틈으로 내다보니 일본 경찰이 떼지어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뒤늦게 종로경찰서 투탄자가 김상옥임을 파악한 일제가 경찰을 풀어 그의 행적을 뒤쫓아 은신처를 포위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상옥은 망설이지 않았다. 권총을 뽑아 맨 앞에 온 자를 쏘았다. 종로경찰서 형사 다무라였다. 이어서 종로서 이마세 경부, 동대문서의 우메다 경부가 차례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종로서 투탄사건이 일어난지 5일만의 일이다. 김상옥은 뒤쫓는 일경의 추적을 피해 남산으로 올라갔다. 남산은 온통 눈으로 덮혀있었다. 짚신을 거꾸로 신고 눈길을 뛰어 일경의 눈을 피하는 지혜를 발휘하여 간신히 또 다른 은신처에 잠복하였다. 일경의 추적은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일제는 김상옥의 가족과 지인들의 뒤를 밟아 마침내 은신처를 알아내고 1월 11일 새벽 400여 명의 무장경찰대를 풀어 효자동 일대를 뒤졌다, 그리고 그가 은신한 동지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선발대·형사대·기마대·자동차대까지 동원된 엄청난 병력이 동원되었다. 김상옥은 망설이지 않았다. 양손에 권총을 쥐고 이들과 대치하였다. 1대 400여 명의 대결이었다. 서부 활극에서도 보기 어려운 구도였다.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와 일제가 서울 한복판에서 무장대결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김상옥은 쌍권총에서 탄환이 떨어질 때까지 효제동 골목을 누비며 일경에 총탄을 퍼부었다. 3시간 동안의 시가전 끝에 총탄이 떨어지자,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한 방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결 순국하였다. 이때 일경 15명 가량이 숨졌

이 소식을 빠르게 읽을 수 있도록 요약했습니다. 뉴스에 관심이 있으시면 여기에서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OhmyNews_Korea /  🏆 16. in KR

독립운동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시가전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최근 뉴스, 대한민국 헤드 라인

Similar News:다른 뉴스 소스에서 수집한 이와 유사한 뉴스 기사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우금티 대혈전: 동학의병의 패전과 역사적 재평가우금티 대혈전: 동학의병의 패전과 역사적 재평가동학의병군의 패전과 후퇴 우금티 혈전, 역사적 재평가, 독립운동의 의미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제주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의 흔적제주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의 흔적지난 6일, 올레 19코스 트레킹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주 항일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경내 만세공원에는 창열사, 애국선열 추모탑, 3·1 독립운동 기념탑, 절규상, 함성상, 독립유공자 비 등이 있다. 애국선열 추모탑은 제주 고유의 정주문(정낭)을 형상화했다. 높다란 두 기둥은 음양조화를 이룬 정주탑으로 천·지·인과...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독립운동의 선구 보재 이상설독립운동의 선구 보재 이상설'항일독립운동의 선구'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에서 시골 선비인 아버지 이행우와 어머니 벽산 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보재(溥齋), 아명은 복남이다. 어렸을 때(7세) 아버지가 동부승지를 지낸 이용우에게 양자로 출계하여 서울로 옮기면서 그는 서울에서 자랐다. 25세(189...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안중근 의사 기념관, 윤석열 탄핵 소추 후 희망의 글귀에 넘쳐안중근 의사 기념관, 윤석열 탄핵 소추 후 희망의 글귀에 넘쳐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 후 한국 국회의원은 중국 하얼빈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방문하며 안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고 희망을 표했다.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밀양경찰서 폭파: 최수봉 의사의 삶과 투쟁밀양경찰서 폭파: 최수봉 의사의 삶과 투쟁1920년 12월 27일, 의열단원 최수봉 의사가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는 용맹한 거사를 벌였습니다. 이 사건은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노와 조선 민족의 의기를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최수봉 의사는 어린 시절부터 일제의 식민지 행정과 학대를 목격하며 민족 의식을 키웠고, 숭실학교를 통해 독립 운동의 정신을 배우며 독립 운동에 몰두했습니다. 의열단원 김상윤과 이종암과 함께 밀양경찰서 폭파를 결심한 최수봉 의사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며 애국 정신을 빛내주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강우규 의사의 독립운동과 마지막 유언강우규 의사의 독립운동과 마지막 유언강우규 의사가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두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폭탄으로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순국한 이야기와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삶을 소개합니다.
더 많은 것을 읽으십시오 »



Render Time: 2025-04-14 00:0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