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살아온 배경도, 나이대도 다르다. 그런데도 한집에서 부대끼며 살아간다. 전통적 가족 개념으로는 포섭하기 힘든 개인들 간의 공존은 새로운 반려문화의 한 축이다.
충북 옥천군 상삼리의 공동생활홈에서 서로에게 소중한 반려 존재로 함께 살고 있는 이춘자·정종숙·여예자·김재분씨까 지난달 12일 식탁에 모여 앉아 활짝 웃고 있다. 성동훈 기자분홍색 신형 냉장고 양쪽 칸에는 식재료가 빽빽이 들어찼다. 제철 맞은 귤과 한과도 한 바구니 있다. 빨갛게 무친 무말랭이는 동나기 직전이다. 문짝은 피곤할 때 한 병씩 들이켜는 자양강장제 자리다. 바로 옆 김치냉장고에는 김장김치가 숨쉰다. 식탁 위엔 포슬포슬하게 찐 밤고구마가 손길을 기다린다. 하늘빛 타일로 꾸민 ‘왕언니’ 여예자씨의 부엌은 특별한 구석이 있다.
여씨는 하루 종일 훈훈한 온기가 도는 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삼시 세끼 해먹는 재미는 덤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난방비가 얼마나 큰데요. 농촌 집들 가 앉아있으면 무릎팍 시려워. 여기선 이렇게 여럿이 얘기도 하고 얼마나 좋아유.”핵가족화와 고령화에 따른 중·노년 1인 가구 증가는 더 이상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표한 고독사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2021년 전체 사망자의 1%, 3378명이 혼자 살다 세상을 떠나 뒤늦게 발견됐다.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공동생활홈은 공동체 생활을 통해 홀몸노인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주거 모델이다. 2014~2015년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촌 고령자 공동시설 지원 시범사업’을 벌여 공동생활홈의 긍정적 효과를 확인했다.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공동생활홈 건립을 지원하고 있다. 이곳은 상삼리가 2019년 농식품부가 주관하는 ‘마을 만들기’ 사업 공모에 신청해 나온 결과물이다.
여씨는 ‘이 구역의 요리왕’으로 통한다. 정씨는 “왕언니가 호박전을 기가 막히게 잘한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여씨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같이 있으니까 심심하지도 않고 좋아요. 이렇게 좋은 데가 있는가. 약도 챙겨주죠, 염색도 해주죠, 파스 붙여주죠. 내 집 식구잖아요. 매느리도, 자식도 누가 그렇게 햐.”막내 이춘자씨는 대전에서 이곳으로 터를 옮긴 지 벌써 20년이 됐다. 상삼리 ‘준토박이’ 정도 되는 셈이다. 여럿이 함께 사니 가장 좋은 점은 아플 때 외롭지 않다는 것이다. 혼자 시름시름 앓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서럽다. “물 한 모금 떠다줄 사람도 없으니 눈물만 나죠. 이제 공동생활을 하니 의지가 되잖아요. 누가 아프면 병원에 연락도 해줄 수 있고 아프면 죽도 끓여줄 수 있고요.” 불면증을 앓는 그에게 상삼리 언니들은 꼬박꼬박 약을 먹었냐고 묻는다. 그 한마디에 마음이 녹는다. 이씨의 세 자녀도 어머니 걱정을 덜었다.
갈수록 가족제도에 편입되지 않고 사는 1인 가구가 늘고 있다. 혼인을 했다고 해도 사별, 이혼 등 갖은 이유로 다시 홀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독립과 고립은 다르다. 정서적·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일상에서 필요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연대는 필요하다. 각자도생하는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를 고민하는 이유다. 따뜻한 밥 지어먹기 힘들고, 잔병치레가 많아지는 노년으로 갈수록 이 같은 연결망이 더욱 절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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