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처음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동행한 아내나 친구의 설명을 들으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만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10여 년 전, 망막색소변성증이 얼마 남지도 않은 내 시력을 무서운 속도로 갉아먹으면서 내 마음마저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기 시작했던 때,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경복궁에 들렀다. 역사라면 내가 잘난 체하기 제일 좋아하는 주제였지만, 답답했다. 머릿속에서는 그려지는데 바로 앞에 두고도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으니까.
같은 강릉이라 가볍게 생각했는데, 길이 생각보다 멀었다. 거기다가 아주 잠깐 빼꼼히 얼굴만 내비친 해가 사라지고 또다시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살짝 망설여지려는데, 어느새 시작된 언덕길과 절벽, 그리고 멋진 바다 풍경에 감탄한 아내와 누님의 환호가 그칠 줄을 몰랐다. 아내가 작품으로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고, 내 머릿속은 혼란에 빠졌다. 멧돼지 그림도 아니고, 그런데 생뚱맞게 엄청 큰 스테플러에다가 뱃속에 의자라니? 나름 고도로 숙련된 내 가상의 눈이라 자부했건만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아니, 아니고. 잘 들어 봐. 어엄처엉나게 큰 멧돼지 같은 게 무지 무섭게 이빨을 드러내면서 입을 딱 벌리고 있어. 그런데, 털처럼 온몸에 커다란 스테플러 철심이 박혀 있어. 진짜 털 같아 보이기도 해.""공사용 'ㄷ'자 철심 수천 아니 수만 개를 하나씩 하나씩 박아서 멧돼지 털처럼 보이게 만들었어.""그러니까 잘 들어 봐, 비록 스테플러 색, 그러니까 은색 그대로지만, 하나하나가 음영도 보이고 굴곡도 만들어서 멧돼지를 덮은 털 같아 보여.
넉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혹시 몇 년 후에는 이 머릿속 그림들이 진짜 내가 본 걸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때 아내와 누님이 아니었다면 난 다시 바보 멍청이 쪼다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웬만하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아내와 난 성남아트센터를 자주 이용한다. 성남시향 정기 공연은 거의 빠뜨리지 않았고, 시간만 허락하면 연극도 다른 공연도 내 발로 찾아간다. 그리고 이제는 미술관에도 단골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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