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5·18 성폭력 사건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린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큰 성과는 과거사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는 방식의 새로운 기준점을...
패턴 발견에 ‘집단적 경험’ 규정지난해 말 5·18 성폭력 사건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린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큰 성과는 과거사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는 방식의 새로운 기준점을 세웠다는 점이다. ‘약 반세기 전의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조사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조사위는 “성폭력 진상조사의 목적은 형사처벌을 전제로 한 범죄 발견이 아니다. 진상을 규명해 국가의 책임을 묻고, 피해자의 치유와 명예 회복 방안을 권고하는 데 있다”는 방향을 세웠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조사위가 진행한 비공개 공청회에서 ‘과거사 피해자의 트라우마와 피해 사실 증언 억제 요인을 고려한 진상조사’를 발표한 이완희 동국대 교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피해자의 기억을 손상시킬 수 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 사람은 그 순간을 ‘스냅샷’처럼 기억하는데 이것조차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고 말했다. 5·18 성폭력은 피해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안긴 트라우마 사건이고, 사건 후 40여년 만에 진상조사가 이뤄졌다는 특수성이 있다. 계엄군들은 군복 안에 개인 신분을 숨겼기에 특정하기 어려웠다. 피해자들이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본다 해도 식별할 수 없었다는 게 일반 성범죄와 다르다. 이들의 피해엔 폭력의 역사성, 억압의 중첩성, 피해의 복합성이 두루 녹아 있다. 과거 한국 사회에 지배적인 ‘여성의 정조’ 관념과 순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부장적 통념은 피해자들이 성폭력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자책하게 했다.
피해자 중심적으로 접근하되 이들의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작업도 거쳤다. ‘핵심 진술’을 분석한 뒤 여기에 부합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 증거를 확인해 종합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이는 과거사 사건에 대한 해외 진실위원회의 판단 기준을 참고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진상규명 판단 기준으로 ‘개연성의 균형’ 또는 ‘증거의 우위’를 제시한다. 윤 팀장은 “어떤 사실이 진실일 개연성이 그렇지 않을 개연성보다 클 때 증거로 채택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 사안에 대해 여러 해석이 상충하면 위원회가 모든 정황 증거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결정한다.
이런 복합적인 조사를 통해 당시 피해자들이 겪은 일이 ‘집단적인 경험’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상숙 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은 “성폭력 사건 피해자는 이 사건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하다”며 “증거가 없을 경우 고립되기 쉽지만 피해자들이 함께 목소리를 낼 때 전체의 피해 집합성을 드러낼 수 있다. 서로가 서로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말했다. 조사위는 이렇게 각 상황에 따른 유형을 구분해 ‘5·18 성폭력’이 발생한 패턴을 밝혀냈다. 계엄군이 5월18일 금남로 일대에 최초 투입된 시점부터 여성에 대한 강제 탈의가 이뤄졌다는 점, 도심에서 2~3명의 군인이 1명의 여성을 강간하거나 추행할 때 망을 봐주는 군인이 있었다는 점, 연행과 구금 과정에서는 압도적인 공포 속에서 피해를 입었으며, 수사실에서 성고문 뿐 아니라 구금시설에서도 수시로 성적 모욕과 기합이 있었다는 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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