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에 제너럴 셔먼호사건과 병인양요 김옥균 김옥균평전 김삼웅 기자
김옥균은 성장하면서 여러 면에서 우수성을 보였다. 천부적인 자질에다 양부의 넉넉한 인품에서 많은 것을 익히고 배웠다. 양부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그도 함께하였다. 그는 학문·시문·글씨·그림·음률 등에서 크게 향상되어 돌아왔다. 부자 마을 서울 북촌에 살면서 더욱 공부에 열중하였다.
대포 2문을 비롯하여 중무장한 배에는 24명이 타고 있었다. 대동강 입구에서 황주목사 정대식은 이들에게 조난선의 예로 대우하여 식량과 땔감을 주었다. 그리고 통상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멋대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퇴역 장교 임춘전의 활약으로 이현익은 구출되었으나 나머지 2명은 살해되고 말았다. 이에 평양감사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를 응징할 대책을 강구했다. 때마침 장마가 그쳐 물이 줄어들자 제너럴 셔먼호는 모래 위에 얹혀 꼼짝할 수 없었다. 이때 평양의 군인과 백성들이 장작을 실은 배를 상류에서 떠내려 보내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시켜 화공을 개시했다. 결국 제너럴 셔먼호는 불탔고, 살아남은 선원은 끌려 내려와 타살당했다. 9월에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 벨로네는 1866년 초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처형된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 공격을 명령했다. 로즈는 3척의 군함으로 8월 18일에 1차 침입해 마포 서강까지 올라와서 수로를 관측했다. 그리고 9월 5일 군함 7척과 병력 600여 명으로 2차 침입하여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천주교 탄압이 더욱 심해지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15세 전후하여 이같은 외세의 침략 소식을 알게 된 김옥균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일반 청소년들에 비해 영민하고 다양한 독서를 통해 지식의 폭이 넓었던 그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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