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침햇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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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논설위원 미국 사법부의 보수화를 이끈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의 주특기는 ‘공익소송의 무력화’다. 그는 판사 임용 전 변호사로 활동할 때 시민단체가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낸 환경·인권 소송에서 피고 쪽을 대리해 대부분 승소했다. 그가 소송 전략에 활용한 것은 ‘절

미국 사법부의 보수화를 이끈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의 주특기는 ‘공익소송의 무력화’다. 그는 판사 임용 전 변호사로 활동할 때 시민단체가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낸 환경·인권 소송에서 피고 쪽을 대리해 대부분 승소했다. 그가 소송 전략에 활용한 것은 ‘절차주의’였다. 소송의 본질적 문제를 다투지 않고 원고의 적격성이나 법원의 관할권, 소송 기한 등 절차적 문제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그가 1990년 조지 부시 정권의 법무부에서 일할 때 환경단체가 낸 소송에서 구사한 전략이 대표적이다. 연방정부가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광산 채굴을 허가한 것이 주민의 환경권을 침해했는지가 소송의 본질이었다. 그는 원고가 이 소송을 낼 자격이 있는지를 물고 늘어졌다. 광산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는 환경단체 회원이 원고로 참여했는데, 로버츠는 원고 자격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국에 있는 ‘환경에 관심이 많은’ 일반 시민들도 모두 원고가 될 수 있는 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절차주의는 판사에게도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한다. 정부나 기업이 시민의 기본권을 명백하게 침해한 사건에서 판사는 절차적 하자를 핑계로 정부와 기업의 손을 쉽게 들어줄 수 있다. 변호사가 차려준 ‘밥상’을 못 이기는 척 받아먹으면 된다. 반면, 시민들은 절차주의가 강조될수록 불이익을 받기 쉽다. 절차적 장벽이 높으면 공익소송을 통한 시민의 기본권 구제가 힘들어진다. 공익소송을 통해 힘을 키워온 시민운동의 영향력도 그만큼 쇠퇴한다. 결국 절차주의는 미국 정치에서 진보 진영, 즉 민주당 쪽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 법조 전문기자 제프리 투빈은 자신의 책 ‘더 오스’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처럼 보수 성향이 강한 법조인들이 절차주의를 활용해 자신의 정치색을 들키지 않고 공화당을 은밀하게 지원한다고 비판했다.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공화당 편들기’라는 것이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 1심 재판은 사법부의 역할을 새삼 묻게 만든다. 보수 진영은 ‘피고인이 누구인지 눈을 가린 채 재판을 했을 때 나올 법한 형이 선고됐다’고 호평한다. 거대 야당 대표라는 ‘정치적 사안’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법리에 따라 판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숱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윤 대통령과의 형평성은 어떻게 되나. “유권자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도록 민의를 왜곡해” 낙선한 이 대표보다 당선된 윤 대통령이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옳지 않나. 이런 모순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게 사법부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검찰의 ‘선택적 기소’에 눈을 가린 채, 검찰이 차려준 밥상을 그냥 받아먹기만 하는 것은 국민이 기대하는 사법부의 역할이 아니다.판사들의 보수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윤석열 정권 들어 더욱 심해졌다는 말이 나온다. 그 원인을 문재인 정권 때 있었던 ‘사법농단’ 수사에서 찾는 시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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