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통해 펼쳐지는 사랑의 이야기를 리뷰하며,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는 희망을 찾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을 꿰고 다닌 적이 있었다. 20대 때 나는 시네필을 꿈꿨다. 시네필이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좋아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사랑해야 한다. 서울 종로 낙원상가 옥상의 시네마테크는 시네필의 성지였다. 그곳에서 어려운 이름을 가진 감독의 영화를 봤다. 그것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서른 살 이후부턴 사랑이 점점 식었다.'돈 버느라 피곤해서'라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내겐 시네필 자질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육아를 시작하며 영화는 더 요원해졌다. 2023년 겨울 '사랑은 낙엽을 타고'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상을 받은 작품이다. 감독 이름은 아키 카우리스마키 . 어려운 이름답게 그는 전 세계 시네필의 우상이다. 20대 때의 나를 사로잡은 감독 중 하나다. 오랜만에 이런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마음이 식기 전 극장에 갔다. 배경은 핀란드 헬싱키.
가난한 사람들이 나온다. 여자는 마트에서 일을 하다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에 손댔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남자의 사정도 비슷하다. 그는 공사장을 떠돌며 품을 판다. 남자와 여자는 술집에서 처음 눈을 마주친다. 그들은 콩트 같은 이유로 번번이 엇갈리지만, 돌고 돌아 결국 손을 잡는다. 그들 앞에 놓인 상황은 열악하다. 도시는 냉담하고, 뾰족한 희망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랑을 믿어보기로 한다. 이 작품 이후 또 1년간 영화를 잊고 지냈다. 2024년 겨울밤. 스마트폰에서 카톡 알림이 빗발쳤다. 불길한 느낌은 대체로 들어맞는데, 이번엔 과했다. 비상계엄이 웬 말인가. 사나운 밤이 휘몰아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잠을 잘 시간은 한참 지났다. 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침실로 들어갔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 옆에 누웠다. 태어난 지 2년이 갓 넘은 작은 인간. 이제 말이 본격적으로 트이기 시작했다. 최근엔 '최고'라는 단어에 꽂혔다. 연신 검지를 치켜세우며'최고!'라고 외친다. 엄지가 아니라 왜 검지인진 알 수 없다. 아이는 천연한 얼굴로 최고의 잠을 자고 있었다. 이곳은 평온했다. 바깥의 불안과 이곳의 평온 사이 간극은 아득했다. 그 아득함 속에서 1년 전에 본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떠올랐다. 영화 속에서 여자는 종종 라디오를 켜는데 거기에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흉흉한 소식만 흘러나온다.'러시아군이 오늘 민간 병원을 폭격했습니다.' 카우리스마키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이 아무리 이 모양 이 꼴이어도, 여기에는 여전히 사랑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 나를 사로잡았던 이름이 어려운 감독들. 그들이 영화를 통해 내린 결론은 대체로 사랑이었다. 한때는 이것을 식상하게 여겼다. '또 사랑 타령?' 하지만 이제는 그 식상함이 세상을 떠받쳐 왔음을 조금씩 깨닫는다. 소중한 사람의 하루가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 자녀를 위해 지옥철에 기꺼이 몸을 싣는 부모들. 자기 자리에서 어제 했던 일을 오늘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우리를 냉소의 유혹에서 구한다. 물론 세상엔 종종 재앙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 순간엔 다 망할 것만 같다. 수십 년 전 난폭한 역사를 몇 번이나 경험한 앞선 세대도 그때는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무너지지 않았다. 붕괴된 것은 재건됐다. 올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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