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외전] 도초도 농민들을 지키기 위한 김용택의 항일투쟁
일본이 한국을 빼앗은 최대 목적은 한국 황제를 퇴위시키거나 한국 군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항일세력을 탄압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 민중을 빼앗고 한국 땅을 빼앗아 일본 왕실과 대자본가들의 곳간을 늘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1924년에 김대중 대통령을 낳은 하의도의 바로 위쪽인 이 섬에서, 바로 그해부터 역사적인 소작쟁의가 발생한 것은 1919년 3·1운동의 영향이다. 1987년 6월항쟁 직후에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듯이, 3·1운동 뒤에는 그 열기를 바탕으로 농민과 노동자의 단결투쟁이 활발해졌다. 이런 움직임이 가장 왕성했던 곳은 전남 지역이다. 농지도 많고 소작농도 많았기 때문이다. 말로는 수확량의 5할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일 때가 비일비재했다. 지주의 대리인인 마름이 소작인과 협의해 수확량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수확량이 실제보다 부풀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협상과 달리 소작농과 지주의 협상에서는"금년에 많이 수확했잖아"라며 갑이 을의 성과를 실제보다 부풀리고 을을 띄워주는 양상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인 지주인 나카미치 세이타로 등을 만나러 배에 올라탔다. 위 판결문은"피고인 김용택·김상희 등이 소작인회를 대표하여 목포로 달려가 중도청태랑 외 여러 명의 지주를 방문"했다고 기술한다. ○ 1925.10.19. 무안군 도초도의 소작쟁의사건으로 소작회 간부 등이 구금된 것에 분개하여 동 소작회원들은 목포서에 쇄도하여 경찰과 대충돌하여 중경상자가 다수 발생하고 10여 명이 검속되다.이 사건은 단순한 소작쟁의로 그치지 않았다. 일제 공권력이 일본인 지주를 편드는 양상은 이 사건을 민족문제로 발전시켰다. 이런 속에서 경성노농회·조선청년동맹·전조선노농총동맹 등의 항일단체들이 소작농 편에 가세했다. 반일 진영 대 일제 진영의 대결로 판세가 확대됐던 것이다.
이에 따르면, 고석규는 행정업무는 게을리하면서도 일본인 지주들을 비호하고 소작료 징수를 돕는 일에는 열심을 보였다. 자기 동생 고순규에게 일본인들의 소작료를 받아주라는 지시까지 내렸을 정도다. 안 그래도 법원 집행관들이 하고 있는 일을 고순규가 거들도록 한 것이다. 고순규는 소작료를 거둬가는 수준이 아니라 소작농 집에 침입해 곡식을 그냥 집어 가는 행태까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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