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변기의 역학 | 설재인 지음 |한겨레출판 |288쪽 |1만5000원 아정은 뜻밖에 청년 주택지원사업에 당첨된다. 당첨 발표는 진작에 끝났고, 가능성 없는 예비번호를 받고 ...
청년·노인 빈곤 등 뾰족한 해법 없는 현실 ‘관계맺기’의 속살 그려아정은 뜻밖에 청년 주택지원사업에 당첨된다. 당첨 발표는 진작에 끝났고, 가능성 없는 예비번호를 받고 포기하고 있던 터였다. 만 39세인 아정은 만 40세라는 지원 자격 조건에 가까스로 해당했다. 내년부터는 지원조차 못 한다는 사실에 낙담하던 중 벼락처럼 행운이 찾아온 셈이었다. 게다가 아정이 입주할 집은 서울 변두리 잘 포장된 평지의 5층짜리 신축 빌라. 거주 가능 기간 최장 10년, 보증금 6000만 원에 월세 6만 원이었다. 인근 투룸의 전셋값이 3억을 넘는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헐값이었다.
혹시나 변기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 때문에 불량입주자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정은 참기로 한다. 그러다 윗집에 직접 책임을 묻기로 결심하고 윗집을 관찰하다가 그곳에 젊은 남성 외에 한 노인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정은 낮에는 전혀 정체를 드러내지 않다가 밤에만 잠깐 나오는 노인을 보고 ‘등록된 세대원 외에 다른 거주자를 들여서는 안 되는’ 계약사항 위반이라고 확신한다. 윗집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아정은 ‘봉수 파괴 현상’을 해결하지 않으면 지원센터에 신고하겠다며 노인을 협박한다.의 설정은 기이하다. 늙은 부모의 몸을 깎아 작게 만들어 유리병에 가둬버린다는 현대판 고려장, 변기에서 노인의 크리처가 출몰한다는 설정은 다소 장난스럽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청년 빈곤, 노인 빈곤, 관계 단절 등 냉혹한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뒷받침되면서 이 같은 설정은 오히려 현실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소설은 각자도생이라는 생존 원칙과 냉혹한 자본주의를 내면화한 등장인물들을 그려낸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지에 따라 모든 관계는 재편된다. “이웃은 간헐적인 층간 소음과 거실에 있을 때 들리는 현관문 밖의 소리와 온갖 종류의 재활용 쓰레기 그리고 우편함의 우편물이나 현관문 앞으로 배달된 택배 상자의 형태로만” 존재했으며, 폐지 줍는 노인들은 “종이류를 내놓으면 두어 시간 안에 싹쓸이해 가는 사람들. 그리하여 분리배출의 귀찮음을 덜어주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상기의 이야기는 관계 맺기의 속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년주택 당첨으로 주거 불안정에서 벗어난 그는 고립에서 벗어나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중고거래 앱을 통해 동네 친구를 구해보려 하지만 일회적인 술자리로 끝이 날 뿐 관계는 좀처럼 확장되지 못한다. “왜 나와 더 끈끈해지지 않으려 할까, 라고 자문했을 때 나온 결론은 바로 직업과 소득이었다. 남자의 모임을 통해 파생되는 관계들이 분명히 있었다.
이 지점을 공략한 게 바로 실버스파클의 사업이었다. “내 하루하루가 괴로운 이유를 알면서도 그 원인이 가족이라서, 그 소중하다는 빌어먹을 가족이라서 해결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까.” 실버스파클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청년층에 대한 디딤돌”이라고 홍보하며 취약 청년층을 겨냥했다. 이상기의 권유로 새로 실버스파클에 입사한 아정은 여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한다. 부모의 이름으로 지급될 각종 연금들과 유산이 있기에 “가진 사람들이 더 집요하게 욕심을 낼 것”이라며 부자들에게도 이 사업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아정의 말대로 사업은 부유층을 중심으로 승승장구하며 더욱 확대돼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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