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철의 사진 시리즈 ‘가을에’는 그렇게 한창, 가을이면 가을을 탐하느라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우리 땅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서른 즈음에 찍은 사진들이다. 30여 년이 지났지만, ‘가을에’ 시리즈에서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가을에 풍경이 가득 담겨있다. 평범한 현실 안에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느낌들을 재빠르게 포착해 ‘현실 한 올과 비현실 한 올이 교직되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 이갑철 사진의 비범함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다.
서른 즈음에, 그는 봄이 싫었다. 사방에서 꿈틀거리고 재재거리고 터질 듯한 봄이 시끄러워서 싫었다. 반면, 가을이 좋았다. 그림자마저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 같은 그 계절의 핍진함과 서늘한 기운이 좋았다.30여 년이 지났지만, ‘ 가을에 ’ 시리즈에서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가을에 풍경이 가득 담겨있다. 산골 마을 사람들, 분교의 가을운동회 , 벌개미취 피어 있는 들길, 저문 강의 풍경…. 하지만 사진가가 누구인가. 원로사진가 강운구가 “스트레이트로 찍어서 이갑철 처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귀신의 기운을 전해 준 다른 예를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한 ‘충돌과 반동’의 작가다. ‘ 가을에 ’는 모두 어느 한 시절의 일반적인 풍경을 스트레이트로 찍은 사진이지만, 분분한 해석을 낳는 불가해한 정서를 담고 있다.
이 사진을 보자. 첩첩한 산 능선이 원경으로 펼쳐져 있고, 지금은 보기 어려운 미루나무들이 수직으로 뻗어있다. 신작로 길은 길게 휘어져 흐른다. 그 사이를 단발머리 두 소녀가 걷고 있다. 여기까지는, 사진이 보여주는 실제다. 그러나 이 현실은 조금만 각도를 달리하면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뒤바뀐다. 흑백사진 속에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두 소녀의 옷은 흑과 백의 대비를 이룬다. 마치 현실계와 명계가 나란히 어깨를 견 듯하다.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은 뿌리를 하늘로 향한 채 거꾸로 박힌 듯 기이하고, 느낌이 거기에 이르면 산의 농담도 수상해진다. 평범한 현실 안에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느낌들을 재빠르게 포착해 ‘현실 한 올과 비현실 한 올이 교직되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 이갑철 사진의 비범함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있다. 언젠가 작가로부터 이 땅의 사계를 모두 하나씩 시리즈로 작업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봄은’ ‘여름을’ ‘겨울로’, 제목도 정하였던가. 이갑철의 ‘여름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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