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산이라면 북한산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내가 감히 지리산 종주에 도전하게 된 것은 순전히 설악산의 요행 탓이었다. 소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다고 지난봄 동료들 따라 엉겁결에 설악산 대청봉에서 인증샷을 찍고 내려온 것이 화근이었다. 웬걸, 지리산은 설악산이 아니었다. 설악산이 야한 자태로 남
자를 홀리는 농염한 여인이라면 지리산은 좀처럼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 정숙한 여인 같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지루하게 반복될 뿐 도대체 마음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하천 지나 벽소령에서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천왕봉 낙오자, 벽소령의 루저가 됐다.
루저의 하산길은 쓸쓸하고 참담했다. 벽소령에서 함양의 정음 마을로 이어지는 6.4㎞의 임도를 타박타박 걸어 내려오며 자신을 돌아봤다. 운동과 담을 쌓고, 금연과 절주 약속도 못 지키면서 천왕봉을 노린 무모함에 낯이 뜨거웠다. 체력의 한계를 정신력으로 극복하지 못한 나약함이 부끄러웠다. 오르락내리락하다 정상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중도 하산하고 마는 것이 내 인생이라면 그건 운명이 아니라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란 생각도 들었다. 금융자본의 탐욕과 부패를 규탄하는 루저들의 함성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다. 한 달 전 월가에서 시작된 ‘점령하라’ 시위가 전 세계로 번져 15일 80여 개국 1500여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1%의 위너가 판돈을 싹쓸이하는 카지노식 금융자본주의의 야만성과 빈익빈 부익부의 불평등을 참다 못한 99%의 루저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학위와 스펙을 갖추고도 취업을 못한 젊은이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소외감은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다. 난파선을 침몰 위기에서 구하려면 무거운 것부터 바다에 던져야 하지만 1%의 부자들은 무거운 금덩이를 끌어안고 젊은이와 약자들을 바다로 차버리고 있는 형국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의 성공 스토리는 닮았다”면서 교육과 근면을 그 요인으로 꼽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린다. 우리 국민의 73%가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가 노력만으론 성공할 수 없고, 편법과 배경이 필요하다고 본다는 것 아닌가. 가진 자들이 나눔의 정신을 발휘하고, 패자부활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지리산 루저는 제 탓을 하면 그만이지만 이 사회의 루저들은 제 탓만 하고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어법을 쓸 생각은 없지만 루저가 되어 보니 루저도 100%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루저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지리산의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걷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루저는 싫다. 언젠가는 나도 지리산의 속살을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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