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나는 친구들의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이 친구는 이과에 갈 것 같아. 저 친구는 체육 선수가 되지 않을까. 이 친구는 예술가가 될 거야. 어쩐지 그것은 대체로 잘 맞아서 나는 은근히 나의 예지를 믿기 시작했는데 성인이 된 뒤에도 내 것만큼은 캄캄했다. 내
앞은 당장 내일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나는 단명할 운명이 아닐까 그런 이상한 생각도 했다. 하지만 서른하고도 몇 년간 나는 살아있고, 여전히 앞날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다만 뭔지는 몰라도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유아시절에는 내가 요술 지팡이를 휘둘러 금빛 별가루를 흩뿌리면, 모두가 그걸 감탄하면서 보는 상상을 했다. 너무 구체적으로 상상해 반생을 산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히 떠오를 정도로.
영화 ‘작은 아씨들’의 오르골 보석함을 연 듯 영롱한 순간들, ‘레이디 버드’에서 좌충우돌하던 사춘기 시절의 코끝 시린 감각, ‘프란시스 하’에서 뉴욕 거리를 가로지르며 춤을 추는 신체의 생동감, 전세계의 핑크색 페인트를 동내며 워너브라더스 역사상 최고로 흥행한 영화 ‘바비’의 성적, 거대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 차기작 ‘나니아 연대기’,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이라는 커리어까지. 독립 영화 배우로 시작해 할리우드 여성 감독으로서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자리로 성큼성큼 전진하고 있는 그레타 거윅 말이다.그레타 거윅이 영화 ‘바비’ 홍보 차 서울을 찾았을 때 그레타 거윅을 독점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하고 싶은 질문이 너무 많았지만 그를 보자마자 나는 목 끝까지 올라온 “I Love you!!!”부터 외쳤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를 꼭 안아줬다. 우리는 영화 ‘바비’와 여성성과 젠더,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래 참지 못하고 정말 하고 싶었던 질문도 꺼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조급해졌다. 내게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세월이 얼마나 남은 거지? 20년? 30년? 앞으로 나는 몇 권의 책을, 몇 번의 프로젝트를 더 만들 수 있을까? 몇 개의 글과 몇 개의 화보를 생산할 수 있을까? 그것들 중 어떤 것이 휘발되어 사라지고 어떤 것이 남을까?한 세기도 채 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인생. 아무리 건강하고 왕성한 창작자도 한 세기면 스러져 고요해진다. 몇 개의 영화, 십여권의 책, 수십 수백 개의 곡 등등을 남기고. 세월이 유한하다는 걸, 그 세월 안에 내가 해 둘 수 있는 일을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차곡차곡 개켜 놓아야 한다는 걸, 우리는 쉽게 잊는다. 소파에 엎드려 릴스와 쇼츠를 넘기며, 언젠가 내가 바라는 걸 한 순간이 올 거라고, 언젠가 그것을 할 진짜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고, 지금을 뭉개면서, 흐리면서, 결국 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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