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9 - 음악사를 바꾼 피아노
오스트리아 빈의 리히노프스키 대공은 베토벤에게 요청했다. 정중한 요청의 형식을 빌렸지만 사실은 ‘명령‘이었다. 베토벤의 오랜 후원자로서 그 정도 지시는 할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음악으로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으로 깨어난 시민들이 있었고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부르주아 계급이 있었다. 이들이 음악의 새로운 소비자가 된 것이다.영국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피아노 등장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또 서양 고전음악에서 세바스찬 바흐의 평균율을 ‘구약성서’라고 하고,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를 ‘신약성서’에 견주기도 한다. 피아노는 여러차례 개량을 통해 소리의 질을 높여가면서 이 같은 편견을 극복했다. 소리가 나는 현을 제외한 현에서 나는 진동을 줄이는 뎀퍼, 해머가 반사적으로 돌아오게하는 건반과 해머 사이의 잭, 둔탁한 소리를 제어해주는 페달이 개발되었다. 특히 1730년대부터 피아노를 제작했던 독일의 피아노 제작자 고트프리드 질버만은 피아노의 대중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하프시코드로 음악을 시작한 모차르트는 뒤늦게 피아노를 경험했다.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처음으로 만져본 것은 1774~75년, 그러니까 18~19세 무렵 뮌헨을 방문했을 때로 추측된다. 스물한 살 때인 1777년에는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사달라고 간청해서 자신의 피아노를 갖게 됐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저작권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피아노 보급의 영향이 컸다. 피아노의 보급은 음악의 소비행태를 바꿔놓았는데, 과거에는 단지 음악을 공연장에서 듣는 것에 그쳤다면 이제는 피아노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시민계급의 교양으로 자리 잡았다. 그 덕분에 피아노 악보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음악가들이 안정적으로 저작료를 받을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예를 들어 그의 대표적인 종교음악으로 꼽히는 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루돌프 대공에게 돈을 받고 헌정했다가 이후 독일의 출판업자에게 3년 독점 사용권을 주어서 판매했다. 3년 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네 명의 출판업자에게 나누어서 재판매했다. 이런 전략 때문에 베토벤은 유럽에서 팔리는 악보로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로도 윤택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음악계의 첫 아이돌 스타, 프란츠 리스트프란츠 리스트는 공연장에 도착해 피아노에 앉기 전 자신이 끼고 있던 벨벧 장갑을 벗어 객석으로 던졌다. 이를 차지하기 위해 많은 귀부인들이 달려들었다. 귀부인들은 리스트가 던져준 스카프나 장갑을 조각내서 나눠 갖기도 했다.이뿐 아니다. 리스트는 무대의 배치도 바꿔놓았다. 당시 피아니스트는 무대에서 관객을 등진 채 연주를 했다. 하지만 리스트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매력적인 옆모습과 격정적인 제스처,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피아노의 배치를 틀어서 관객들이 자신의 옆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리스트가 이처럼 가볍고 화려하고 방탕한 피아니스트만은 아니었다. 음악가로서의 철학이 누구보다 분명했고 음악가들의 권리와 자존감을 위해 투쟁한 전사이기도 했다. 당시 유행하던 생시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그는 단지 주장에 그치지 않고 국제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합창과 음악 축제를 발전시키고, 음악 학교를 설립하고,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서 중요한 작곡가들의 악보를 싼값에 출판하도록 했다. 그는 “싼값에 배포하면 피아노가 있는 가정은 베토벤 등의 걸작들을 수집하여 집안에서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피아노의 가격은 급격하게 내려갔고 많은 가정으로 보급됐다. 피아노 가격이 1850년대에는 영국 교수의 12개월치 월급이었다가 50년후에는 3개월치 월급으로 내려갔다. 1945년 파랑스 파리에는 6만대가 넘는 피아노가 보급됐고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만 10만명이 넘었다. 당시 파리 인구가 100만명이었으니 열명 중 한명은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예기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에서 피아노를 ‘거실의 필수품’이라고 정의했다.
경제·산업 분야에서 압축적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한국은 음악에서도 압축적 근대화에 성공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만든 피아노 교육 표준코스가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체르니는 ‘100ㆍ30ㆍ40’ 같은 숫자로 분류된다. 체르니의 노하우가 들어있는 연습곡 100곡을 묶은 연습곡집을 떼고 그다음 30곡, 40곡으로 순서를 밟아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메이지유신 10년 후인 1879년, 일본은 서양음악 도입을 위한 연구기관인 음악취조괘를 설립하고 미국인 교사 메이슨을 초빙했다. 보스턴에서 초등음악교육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던 메이슨은 당시 미국과 유럽 각 지역에서 활용되고 있던 주요 음악 교재들을 활용해 음악 교육을 진행했는데 이 교재 중 하나가 1850년경 독일에서 출판된 바이엘의 연습곡집이었다. 바이엘의 교재가 일본에서 히트를 치면서 바이엘은 음악 교육의 대명사가 되었다.
야마하 도라쿠스는 1889년 하마마쓰에 ‘야마하풍금제작소’를 세웠고, 1897년 10월 자본금 10만엔으로 ‘일본악기제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바로 자체적인 피아노 제작에 성공했고 세계 최대의 악기 기업으로 성장했다. 야마하는 악기 회사로 출발했지만 오토바이와 골프채 등 악기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분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런데 이런 분야도 사실은 악기 개발 과정에서 얻은 기술을 적용해 확장해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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