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발생한 12.3 친위 쿠데타 실패 사례를 태국 역사 속 여러 쿠데타 사례와 비교 분석하며 그 원인과 결과를 탐구합니다.
한국에서 12.3 친위 쿠데타 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는 데 쿠데타라는 주장도 있지만 친위 쿠데타 는 정권을 잡고 있는 측에서 권력을 강화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딱 떨어지는 친위 쿠데타 입니다. 윤석열은 12.3 쿠데타 의 이유를 야당의 입법 독재(정부관료 탄핵, 예산 삭감)와 종북 반국가 세력의 준동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태국은 한때 '쿠데타의 실험실'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수많은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1932년 입헌 혁명 후 지금까지 22 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는데 그만큼 종류-쿠데타, 친위 쿠데타 , 조용한 쿠데타 등등 다양합니다. 이 중 가장 전형적인 친위 쿠데타 는 1971년 11월 17일 쿠데타였습니다. 명분은 입법부의 행정부 위협, 좌파와 공산주의 불순분자들의 국정혼란 야기가 입헌군주제에 심각한 위협에 이르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일견 12.
3 친위 쿠데타는 50여 년 전에 발생했던 태국 쿠데타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태국의 친위 쿠데타는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친위 쿠데타가 실패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12.3 친위 쿠데타가 실패한 것은 좀 특이한 경우일 수 있다. 독재 정권으로의 회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국민들의 강력한 의지, 국회의 신속한 계엄 해제 요구안 가결, 군부와 경찰의 자제력 등을 쿠데타 실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들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태국의 1971년 친위 쿠데타 원인을 좀 더 들여다보기로 하자. 1969년 7월 25일 닉슨 독트린 발표 후 동남아에서의 미국 영향력 감소는 군부 지도자들에게 국내 안보 상황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게 합니다. 이러한 우려 속에서 여당 내 분열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던 타넘 낏띠카쩐 총리는 비상 시국을 타개할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다양한 쿠데타의 원인 중에 진짜 원인은 군부의 정치적 이익에 불리하게 전개된 국내 정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타넘은 계엄령 통치를 자행한 싸릿 타나랏 군사 정권 출범 후 10년 만인 1968년 신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재개시켰습니다. 의회는 임명직 상원과 직선 하원으로 구성됐습니다. 싸릿 쿠데타 후 1959년 임시헌법으로 탄생된 의회는 전원이 임명직 의원이고 민간 관료, 군과 경찰 출신으로 충원됨으로써 정치적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바 있다. 1969년 2월 선거에서 타넘이 창당한 싸하쁘라차타이당은 의회 총의석의 34% 남짓(75석) 차지하는 데 그치자 33%(71석)를 차지한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여 의회 내 과반수를 상회하는 의석을 확보해 정부를 구성했다(총 219석 중 146석). 10년 만에 개원된 민선 의회에서 여야는 행정부에 대한 적극적 견제에 나섰습니다. 보다 많은 지역개발 예산 요구, 행정부에 대한 간섭, 정부 예산 삭감, 예산안 심의 지연, 내각 개편 요구, 정부 시책과 부정 부패 비판 등으로 행정부와 의회 간에는 알력 다툼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이런 현상은 무소속 의원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여 정부를 구성했던 여당쪽이 더 심각했습니다. 무소속 의원들에게 지역개발 예산을 약속했으나 이를 어기자 반발이 터져 나왔습니다. 타넘은 1968년 헌법에서 각료직을 군과 민간 관료로 채우고 여당 의원의 각료직 참여를 금지시킨 바 있는데 여당 의원들은 이에 대해서도 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일방적인 계엄령 통치하에서 온갖 정치•경제적 이익을 다 누렸던 싸릿의 후계자 타넘 군부 세력은 의회 내 다양한 정치 세력의 요구를 수렴할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문제 해결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쿠데타뿐이었습니다. 쿠데타 직후 타넘은 과도 정부 격인 국가 행정 위원회를 만들어 통치했으며 이듬해인 1972년도에는 68년 헌법을 개정해 전원 임명직 의회를 만들었습니다. 임명 의회는 대부분 군, 경찰, 관료 출신으로 채워졌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73년 초부터 태국 전국 학생 센터(NSCT) 중심의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으며 1973년 10월 14일 새벽 학생들과 경찰 간의 충돌을 시작으로 시위는 방콕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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