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의사 순국일
"내가 작년 말 국내로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았지만, 기대와는 전혀 동떨어진 성과를 거양했을 뿐이오. 목표가 20만 원이었는데 겨우 3,350원밖에 아니 모였으니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조차 모를 지경이오.""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독립운동의 결의를 북둗우고 친일 잔당들의 기세를 억누르는 일이오. 국내에 결사대를 파견하여 적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비협조적인 친일 부호들을 응징해야 하오. 지금은 3,350원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이 돈을 활용해서라도 거사를 도모해야겠소."김창숙과 류자명은 천진 프랑스 조계의 한 여관에서 나석주를 만나 폭탄 세 개를 건넸다. 그 폭탄은 신채호가 언젠가 거사에 쓰려고 애지중지 보관해온 것들이었다. 폭탄을 건네받으면서 나석주가 류자명에게 물었다."그렇군요. 세월이 너무도 빨리 흐릅니다. 이룬 것도 없이 시간만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 무렵 김구는 재령군 북률면 무상동 소재 보강학교의 교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보강학교는 노동자들의 기부금을 모아 1909년 1월에 설립된 노동학교였다. 김구는 매주 하루씩 보강학교에서 근무했다. 김구가 장덕준과 마주앉아 나석주의 행방에 대해 말을 주고받은 곳도 보강학교 교무실이었다. 1920년 동아일보 조사부장으로 재직하던 장덕준은 일제 군대의 만주 한인 참살을 취재하다가 피살된다. 봉오동 전투 패전을 보복하고, 3‧1만세운동 이후 늘어나고 있는 독립군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일제는 간도 일대의 민간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는데, 그 참상을 조사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1910년에는 실패했지만, 1914년에 이르러 나석주는 마침내 북간도로 망명했다. 북간도로 온 나석주는 이동휘가 설립한 동림 무관학교에서 8개월 동안 군사 교육을 받았다. 1916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귀국해 국내에 머물던 1919년에는 3·1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에는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서 결성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친일파 은률 군수 최병혁을 처단하는 거사에 직접 참여했다. 그 후 일제의 체포를 피해 1921년 10월 목선을 타고 중국 천진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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