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 왜 '글자 없는 비석' 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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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 왜 '글자 없는 비석' 세웠을까 벌거벗은세계사 무미랑 주나라 측천무후 당나라 이준목 기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 지금까지도 평가가 엇갈리는 논란의 인물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녀를 중국사에 손꼽히는 악녀 중 한 명으로, 누군가는 시대와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어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선구적인 여걸이라고 평하기도 한다.4월 18일 방송된 tvN 95회에서는 '측천무후! 당 제국의 재앙 혹은 위대한 여황제?'편을 통하여 측천무후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중국사 전문가인 이성원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출연했다.측천무후는 624년 중국 산시성에서 당나라의 개국공신인 아버지 무사확과 수나라 황족 출신이던 어머니 양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평민 출신이었던 아버지 무사확은 목재상으로 당 건국 과정에서 고조 이연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개국공신 가문의 금수저 딸로 태어난 측천무후의 본명은 '무조'였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긴 세월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을 열심히 익히며 자기개발의 기회로 삼았다. 당시는 태종이 '정관지치'로 불리우는 태평성대를 열던 시기라, 측천무후는 태종을 정치적 스승으로 삼아 유심히 지켜보며 통치술과 식견을 배웠다.태종이 나이가 들며 병환으로 앓아눕게 되자 측천무후는 황제의 곁에서 병간호를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주 병문안을 온 황태자 이치 만나게 된다. 당시 측천무후의 나이는 22세, 이치는 18세였다. 서로에게 운명적인 끌림을 느낀 두 사람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태종의 임종을 목전에 두고 금단의 사랑을 키워가게 된다. 온화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던 이치에게는, 아버지 태종이 꺼려했던 측천무후의 단호하고 강인한 성격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왔다.태종이 죽고 이치가 새 황제인 고종으로 즉위했지만.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예법에 따라 황제의 자식을 못 낳은 후궁이었기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야 했다.

왕황후는 선황의 후궁 출신에 고종보다 연상인 측천무후를 자신의 경쟁대상으로 생각하고 경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훗날의 역사를 아는 이들에게는 결과적으로 '여우를 쫓으려다가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순간'이었다.측천무후와 왕황후의 연대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왕황후의 지원속에 황궁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측천무후는 겸손한 모습으로 황후의 시중을 자처하며 고종과 왕황후 모두에게 환심을 샀다. 왕황후의 기대대로 고종은 소숙비를 멀리하고 측천무후가 모든 총애를 독차지했다. 고종은 측천무후를 정2품 소의에 봉하여 태종 시절보다 단숨에 품계가 급상승했다. 또한 측천무후는 태종의 후궁 시절에 익힌 정치 지식과 판단력을 바탕으로 고종에게는 후궁을 넘어 '정치적 조언자'로까지 위상이 급상승했다.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측천무후는 오래가지 않아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측천무후는 놀랍게도 어린 영아였던 딸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인 뒤, 병문안을 온 왕황후의 죄로 뒤집어씌우며 모함했다. 분노한 고종은 왕황후를 폐위하고 측천무후를 대신 황후로 올리려고 했다. 라이벌을 모두 제거한 측천무후는 655년 마침내 당 제국의 황후 자리에 오른다. 평민인 목재상 아버지의 딸에서 후궁과 비구니를 거쳐 대제국의 황후 자리까지 오르는 인생역전의 순간이었다. 당시 측천무후의 나이는 32세로 황궁에 재입궁한 지 불과 2년 만의 일이었다.측천무후는 황후의 자리에 오른뒤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대거 제거하는 대숙청을 단행했다.

대세가 기운 것을 파악한 측천무후는 자신이 페위한 아들 중종에게 황위를 계승하고 물러났다. 중종은 국호를 다시 당나라로 되돌리면서 여황제가 통한 15년간의 주나라 치세는 막을 내렸다.반란 이후 궁궐에서 칩거하던 측천무후는 그해 겨울, 돌연"왕황후와 소숙비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화를 입은 집안의 성씨와 관직을 모두 복권하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측천무후가 속죄의 의미도 있지만,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 수 있는 권력갈등를 미리 없애려고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또한 측천무후의 사후, 그녀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의외로 아무런 글귀도 새겨지지 않았다. 한때 황제까지 오른 그녀의 위상으로 봤을 때 관행적으로 업적이나 공덕이 기록되던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일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과 자식까지 죽인 그녀의 악행이 기록될까봐 두려워했다는 설, 반대로 비석에 새기기에는 너무 업적이 많아서 비워두었다는 설까지 해석은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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