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분만 걸어 나가면 바다였다. 예닐곱 살 아이 걸음으로도 충분했다. 쓰레기 날리는 짧고 좁은 골목을 달려 나가면, 좁고 지저분한 회색 길이 있었고, 그 바로 앞에 좁고 더러운 회색빛 바다가 누워 있었다. 수평선 대신 거대한 목재 공장과 창고들이 줄지어 있던 그 바다를 나는 좋아했다. 옆에서 아주머니들이 그물을 꿰...
십 분만 걸어 나가면 바다였다. 예닐곱 살 아이 걸음으로도 충분했다. 쓰레기 날리는 짧고 좁은 골목을 달려 나가면, 좁고 지저분한 회색 길이 있었고, 그 바로 앞에 좁고 더러운 회색빛 바다가 누워 있었다. 수평선 대신 거대한 목재 공장과 창고들이 줄지어 있던 그 바다를 나는 좋아했다. 옆에서 아주머니들이 그물을 꿰매는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늦도록 뛰놀았고, 밤이 되면 공장 불빛이 바다 위에서 반짝였다. 그 곳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다. 여덟 살 때 나는 바다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또다른 인천의 달동네로 이사 갔다.
두어 칸 작은 공간의 이름은 큰물공부방이었다. 얇은 벽을 타고 뱃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친구들이 있었고 잘 웃는 선생님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공부방에는 책이 많았다.어머니는 큰물공부방 활동과 만석동 철거투쟁 과정에서 만났던 인연들을 기억하신다. 비록 글자는 잘 몰라도 리더십도 있고 똑똑하셨다던, 가족과 이웃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있던 아주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나에게 공장과 갯벌의 바다가 다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종종 자랑처럼 말한다.큰물공부방이 있던 만석동이 흐릿한 어린 기억 속 고향 같다면, 해님방이 있던 십정동은 돌아갈 집 같다. 가끔 꿈에서 철거되기 전의 그 동네를 걷는다. 어릴 때 내 눈에 비친 것처럼 비탈은 가파르고 골목은 길다. 좁은 골목에는 때묻은 스티로폼 박스 위 붉은 분꽃과 메꽃들이 올라서 있다.
그때는 '하나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여기저기 붙어있던 시기였다. 정부는 불임시술을 하는 병원에 지원금을 주었고, 병원들은 가난한 동네를 돌면서 '간단한 무료 수술'이라며 여성들을 꾀어 데려가 불임 시술을 시켰다. 사인을 한 뒤에는 '마음이 바뀌었다, 안 하겠다'고 해도 간호사들이 양 옆으로 팔을 잡고 봉고차에 태웠다고 한다. 그날도 간호사들을 피해 달아나던 아주머니가 해님방으로 온 것이었다. 정확한 정보도 충분한 상담도 진료도 없는 마구잡이 수술이라, 당연히 후유증도 컸다. 해님방에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모아 제출한 건의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가족의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 하는 형편인데, 당시 받은 수술로 인해 수술 전에는 겪지 않던 통증으로 매일 일정한 기간 또는 수시로 몸져눕게 되고, 그 치료비 또한 적지 않습니다. .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과 같은 말들이 당연한 속에서 나는 자라났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엄마 잘못 만나서 어린 아이들이 달동네에서 고생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어린 우리가 만석동에서, 십정동에서 자란 것은 드문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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