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살 '우리 애기'... '다음 생에도 엄마 딸로 태어나줘' 이태원_참사_희생자 이태원_참사 강가희 군무원 이주연 기자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 분향소, 맨 처음에 놓인 가희씨 사진 속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 후드득, 눈물이 맺힐 새도 없이 쏟아졌다. 딸의 영정 사진을 닦으며 하얀 국화를 사진 앞에 놓아 둔 엄마는 서너 걸음 떨어진 조예진씨 사진 앞에서 또 한 번 멈췄다. 새로 꽂을 받아들어 헌화한 후 또 서너 걸음 옮겼다. 이번엔 추인영씨 사진 앞, 엄마는 또 한참 시간을 보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전날 병원에 실려 온 게 오후 11시 45분인데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도착했대요. 10분 동안 심폐소생술을 했더니 심장이 뛰더라는 거예요. 그 때부터 면회 할 때마다 고비라고..." "가희가 고등학교 때부터 편의점, 식당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제가 '일 다니지 마' 그래도 '아니야~' 이러면서... 친척 어르신들이 주신 돈으로 용돈을 쓰고는, 저한테는 '뭐 사달라, 뭐가 필요하다' 이런 소리 한 번을 안 했어요." "걱정할 것 없는 딸"이었고, 어디 내놔도 남 부러울 거 없는 딸이었다. 졸업을 앞둔 딸은 9급 군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더니 6개월만에 덜컥 합격했다. 2021년 통신군무서기보에 합격해서 이제 막 1년 근무를 채운 참이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취업까지 한 가희씨는, 묻지 않고도 살림을 채워 놓았다."PX 물건이 저렴하니까요. 금요일에 집에 오면 싱크대를 훑어봐요. 그리고는 우유, 식용유, 밀가루, 집에 필요한데 떨어져 가는 거 싹 사다가 꽉꽉 채워놨어요. 나중에 우리 가희랑 살고 싶다 할 정도로 다정하고 기특한... 제가 살면서 제일 잘 한 게 딸을 둘 낳은 거예요."
"그냥 이게 다 내 잘못인가, 그런 생각은 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지 5년이 좀 넘었는데요. 가희 사고 나고 11월 중순에 처음으로 엄마를 모시고 아버지 산소에 갔어요. '내가 불효자라서 우리 가희가 그렇게 됐을 때 우리 아버지가 날 안 도와줬나' 자책하게 되더라고요. 엄마는 아버지 산소 가서 너무 좋아하며 웃으시는데 저는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우리 가희 간 건 생각도 못 하시고... 엄마한테 말씀을 못 드렸어요. '가희가 일 적응하느라 바쁘다', 그렇게만 말했죠.""제가 기름집 방앗간에서 일한 지 5년 좀 넘었어요. 가희 그렇게 되고 한 달을 못 나갔는데 월급을 넣어주신 거예요. 일 안 해도 또 월급을 주실까봐, 미안한 마음에 그만둔다는 소리를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일으켜 세워주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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