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혐오에 잠식된 사회상은 결국 일본이라는 나라를 전쟁으로, 범죄의 길로 그리고 패망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때의 역사적 교훈에서 시사점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은 비단 현대 일본인뿐만이 아닐 것이다. ✔ 자세한 기사 보기 ▶
1938년 12월 18일,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현대 중국의 국부로 여겨지는 쑨원 총통의 측근이었던 국민당 정부의 거물정치인 왕징웨이 전 행정원장이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충칭을 탈출해 하노이로 향했던 것이다. 이미 실무진 단계의 접촉을 거쳐 일본 측과 주요 내용을 협의했던 왕징웨이는 하노이에 도착 후 그해 12월 30일 '대일화평' 성명을 발표했다.노구교 사건 이후 중국과 일본은 1년이 넘게 전면전쟁을 지속하고 있었고, 수도 난징을 비롯한 중국 동부의 주요 지역들은 일본군의 공세에 유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중화민국 정부가 거듭 양보의 뜻을 타진했음에도 제국 일본은 '중화민국 정부를 말살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침략의 고삐를 더욱 죄었다. 중국 전선의 확대로 전쟁의 주체인 일본 육군의 위세는 더욱 가중됐던 까닭이었다.
이미 '장제스 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고노에 내각은, 그 대안으로 '왕징웨이 추대 공작'을 생각해냈다. 즉, 왕징웨이가 수반이 된 새로운 중국과 교섭하여 화평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1938년 11월 3일, 고노에 총리는 '동아신질서 건설이야 말로 일본의 성전 목적'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항일용공정권'이 섬멸되기만 한다면 평화가 올 것이라는 신호를 줬다.왕징웨이는 중국이 결코 완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 없으리라 판단했고, 오랜 전란으로 신음하는 중국을 구할 길은 오직 일본과의 대화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왕징웨이 측과 일본 측 실무진들은 11월 12일과 20일에 상하이에서 접촉해 구체적인 사안들을 협의했다.
중국 대륙에서 싸우고 있는 일본 병사들의 사기를 꺾는다느니, 군사상의 작전은 통수권의 범위에 속하며 아무리 수상이라 해도 그것을 침범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육군 참모들이 억지를 부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당시 일본에 만연했던 '혐중' 실태는 어떠했을까. 요시미 요시아시는 저서 에서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전쟁범죄와 재중 일본인들의 문제적 행태에 대해 지적하면서 중국인에 대한 멸시가 이미 일본 사회 전체에 내재돼 있음을 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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