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바트만(Sarah Baartman)은 18세기 말 남아프리카의 코이코이족으로 태어나 서유럽으로 끌려간 뒤 프릭쇼에 전시되었던 흑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백인 사이에선 ...
사라 바트만은 18세기 말 남아프리카의 코이코이족으로 태어나 서유럽으로 끌려간 뒤 프릭쇼에 전시되었던 흑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백인 사이에선 흔치 않은 커다란 엉덩이의 체형을 가진 그녀는 당시 유럽인들의 인종주의적인 호기심으로 동물과 비교되는 등 과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사망 후에도 기괴하고 특이한 신체의 표본이라는 명분으로 200년 동안 여러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별명은 식민주의 시대의 아이러니한 멸칭이지만, 이후 여러 예술가들은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성의 이름을 재해석해왔다. 평생 백인 사회에서 아시아 여성으로 살아온 시인의 귀에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이 목소리처럼. “내 목구멍, 내 장기, 내 뼈를 되찾아라.”
캐시 박 홍의 시집 에 실린 시 ‘호텐토트 비너스’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 시의 화자는 역사의 오래된 고막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연히 ‘호텐토트 비너스’의 노래를 듣는다. 기나긴 시간과 머나먼 거리를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와 이곳의 화자 사이엔 무수한 풍경이 있다. 무더운 열기 속 초파리의 윙윙대는 시끄러운 소리, 흑인 노예에게 막대기를 들이대는 과학자들의 논쟁, 수많은 다양한 생명들을 별종이란 이름으로 박제해두고 한낱 구경거리로 삼는 싸구려 박람회. 길게 나열되는 이 풍경들은 ‘호텐토트 비너스’가 얼마나 폭력적인 시선에 노출되어 있었는지 알게 한다. 그녀의 피부와 허벅지, 얼굴과 입, 엉덩이의 수치를 재고, 놀라고, 외치는 말들.
이 시끄러운 말들 사이에서 천장의 갈라진 얇은 틈으로 흐르는 빗물처럼 가느다랗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새로운 언어로 발화하려는 시의 화자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그 몸을, 그 몸이 통과해온 깊은 수치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역사 속에서 구경당하고 모욕당하고 우스갯거리가 된 수많은 이들의 몸을 저 무수한 풍경을 거슬러 번역할 수 있을까? “내가 찢겨진 것처럼 당신들을 찢어 놓으리”라고 다짐하는 분노를, “너는 왜 나를 부활시켰어?”라고 묻는 울분을.
이 시집에 실린 다른 시 ‘수집가’에서 화자는 어느 날 문득 새로운 땅에 착륙한 한 여자를 바라본다. 그녀가 혼자 어떻게 지내는지, 무슨 언어로 어떤 노래나 독백을 하는지, 미쳤는지 제정신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무언가를 잡기 위해 아래로 휘어지는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모양만 볼 수 있을 뿐. 그리고 그녀가 헝클어진 채로 “두 단어 사이로/ 숨을 쉬는 것” 같은 모습만 알아차릴 수 있을 뿐.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두 언어 사이의 틈에서라야 간신히 숨을 쉴 수 있다니. 그것은 번역가의 운명을 설명하는 아름다운 묘사만은 아니다. 우리와 연루되어 있는 폭력의 역사 속에서 수치심을 느껴온 몸을 번역해보려는 모든 시도가 그렇다.
‘호텐토트 비너스’가 바란 대로 시는 그녀의 목구멍과 장기, 그리고 뼈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녀가 찢긴 대로 그들을 찢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다른 언어를 가로질러 이 시들은 취약한 몸들을 가려온 역사의 한 장막을 가느다랗게 찢는다. 우리가 그 사이의 틈에서 간신히 숨을 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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