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이라면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데 왜 그곳이 ‘벚꽃놀이의 최대명소’가 되었을까요.
김유신 장군 묘 주변이나 보문단지 같은 곳은 물론이구요. 다른 곳도 온 길가에 벚꽃으로 터널을 이루고 있고,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비가 장관을 이루더라구요. 서울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국회 윤중로 벚꽃이 탐스럽게 피었더라구요.
수필가이지 시인인 차상찬이 1929년 4월호에 기고한 글. “무궁화를 조선의 명화라 하지만 실은 진달래가 조선을 대표하는 꽃”이라면서 “조선인이 외국에서 진달래를 본다면 마치 고국에 돌아온 것과 같이 반가운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는 특히 “조선인의 진달래 사랑은 일본 사람의 사쿠라 애착심 못지않다”고 했다. 벚꽃나무가 웬만큼 자란 1918년부터 창경원은 벚꽃명소가 됐다. 교통이 불편한 우의동을 대신한 것이다. 이어 1924년 벚꽃철부터는 해마다 야간에도 개장했다. 당시 경기 수원읍의 전체 수요전등이 18만 와트인데, 창경원 한곳에만 20만 와트의 조명이 불야성을 이뤘다.한반도로 건너온 일본인 수가 급증했거든요. 1900년 1만6000명 선이던 것이 1910년에는 17만명을 넘겼습니다. 그러다보니 해마다 봄만 되면 일본에서 즐겼던 벚꽃놀이 생각이 간절했던 건데요. 1939년 4월 16일 매일신보의 기사를 볼까요.
매일신보 1941년4월23일자. “용산 육군병원에서 입원중인 용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원에서 다과를 베푼 뒤 창경원 밤벚꽃 놀이 행사를 벌였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특히 “잠시나마 위안할 기회를 만들어주라 하시는 이왕 전하의 황송하신 분부를 받자와 진행됐노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