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두 차례 뇌졸중 수술 후 꺼낸 30년 묵힌 단편소설 16편newsvop
‘한 무리의 청춘들이 흐드러진 웃음을 피워내며 쏟아져 나온다. 스무 살, 젊음이다 ……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을 감아버릴 만큼 부셨던 것은 진달래가 아니라 개나리가 아니라 바로 젊음이 뿜어내는 기운이었음을. 모든 것이 젊다. 이 젊음들이 낯설다.’작가 한미선은 나의 친구로 대학 시절을 함께 했다. 당시는 5.18을 무력으로 짓밟은 군사정권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젊음의 눈부심보다 살벌한 분위기가 압도했다. 사복경찰이 학내에 상주하며 학생들과 같이 수업하고 교내 잔디밭에 앉아 학생들의 동향을 감시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한미선 소설집 ‘구들 밑에 일군 밭’의 표지는 배롱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다. 작가의 고향집에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었고, 이 소설집에는 여러 차례 배롱나무가 등장한다.
그런데 한참 활동하던 시기에 소설을 썼다니? 작가에 따르면 초고를 쓴 시기가 택시기사로, 야학교사로, 자유기고가로, 현장 운동가로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공안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하던 시기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그 소설들이 30여 년 간 서랍에 묵혀 있다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 또는 남다르다. 친구는 3년 전 두 번째 찾아온 뇌출혈로 생사를 넘나드는 수술을 했다. 목숨을 건졌지만 여전히 표현과 거동에 제약이 있는 상태이다. 그간 친구는 지방에선 꽤 유명한 수학 강사로, 가족과 함께 유기농업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재활 치료를 받던 친구는 ‘책을 내고 싶다’는 말을 했고 소설의 존재를 주변에 알렸다.
‘아직 아무도 밟은 이가 없는, 골목길에 덮인 눈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었다. 첫발자국을 내면서 병만은 연신 자신의 발자국을 돌아보았다. 곧바로 걸어보고, 갈짓자로도 걸어보고, 오던 길을 돌아서서 뒷걸음질 쳐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성큼성큼 덩실덩실 발걸음을 큼직하게 떼 보기도 했다.’수학을 전공한 이력에 걸맞지 않은 절묘한 문학적 묘사 능력도 예상을 깼다. 인용은 인물의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을 표현한 구절이다. 모든 첫걸음은 설렘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온 골목길에 첫발자국을 내딛는 느낌, 뭐든 새로 시작할 때의 느낌이 중의적이다. 희열과 불안의 교차, 흔적을 남기는 율동적 행동, 그리고 풍경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들어맞아 이미지로 들썩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