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 극장
1921년 7월 국제공청 제2회 대회 대표증에 첨부된 조훈의 증명사진. 임경석 제공 조훈은 19살 되던 해에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전후 사정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상하이에서 나는 미국으로 밀입국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간도로 갔다. 그 후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금 결핍 때문에 학교는 단지 11개월 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다. 1915년 말이었다.”1 ■ 의병 투쟁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 평양의 기독교계 중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조훈은 식민지 조선의 교육 환경에 울분을 품고서 미국행을 꿈꿨다고 한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리라. 평안남북도의 기독교 청년 가운데 미국 유학을 떠나는 사람이 꽤 있었다. 조훈이 중국 상하이로 간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세 명의 학우가 행동을 같이했다. 그러나 장벽이 높았다. 태평양을 건너는 뱃삯도 문제려니와 출입국 서류를 마련하는 일이 큰 난제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 청부업자는 정직하지 않았다. 그자는 사관생도들이 러시아어에 서툰 점을 악용해 근로계약서를 위조했다. 1년 기한을 2개년으로 몰래 늘렸고, 약정된 근로 할당량을 채우려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도록 꾸몄으며, 노임 수준도 통상 임금의 절반도 안 됐다. 약정 내용을 달성하지 못하면 고용 기한이 다 찼더라도 작업장을 이탈할 수 없었다. 노예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사관생도뿐만이 아니었다. 청부업자의 농간으로 페름현의 공장과 사업소에서 노예노동에 얽매인 조선인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청부업자는 ‘포드랴치크’라고 부르는데, 러시아어에 능숙하고 이미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 맡았다. 그들은 철도 공사장이나 광산, 어장 등지에 노동자를 모집해주거나 관청과 군대에 물품을 조달하는 일에 종사했다. 러시아어를 잘 모르는 신이주민과 관청 일에 어두운 러시아어 문맹자는 일자리를 얻으려면 그들을 통해야만 했다. 근로계약의 관행도 청부업자에게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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