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조차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 땅의 여성들에겐 이름이 없었다. 대갓집 마나님은 누구누구 부인이라고, 여염집 아낙은 어디어디 댁이라고들 불렸다. 죽어서도 마찬가지. 비석이며 기록에도 오로지 성씨만이 남기 일쑤였다. 왕족이며 귀족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5만 원 권에 얼굴을 올린 신사임당조차 사임당이란...
이름조차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 땅의 여성들에겐 이름이 없었다. 대갓집 마나님은 누구누구 부인이라고, 여염집 아낙은 어디어디 댁이라고들 불렸다. 죽어서도 마찬가지. 비석이며 기록에도 오로지 성씨만이 남기 일쑤였다. 왕족이며 귀족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5만 원 권에 얼굴을 올린 신사임당조차 사임당이란 호가 문집에 남아 알려진 것일 뿐이다. 그 이름은 완전히 소실돼 찾아볼 길 없다.
같은 시기 사내들의 이름은 한글자 한글자 깊은 뜻을 살펴서 지었다. 오늘날 보아도 과연 세련된 이름이 수두룩하다. 반면 여자의 이름은 기르는 개와 바꾸어 불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명자, 옥자, 길자, 화자, 춘자, 경자, 연자, 수많은 자자 돌림 아이들 가운데, 의 주인공 순자가 있다.순자는 제 진짜 이름이 순자가 아닌 순일이란 걸 결혼할 때가 되어서야 안다. 그러니까 순자는 정식으로 호적에 든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순일이란 이름을 떡하니 지어놓고도 부모는 물론 주변 어른들 모두가 그녀를 순자라 불렀다. 순일이란 이름을 그 주인이 들어본 적 없었다. 결혼을 하고 호적을 올릴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제가 누구인지를 발견한다. 때는 이미 늦었다. 놓쳐버린 세월이 길고 질었다.
그 시절 많은 순자들에게 그러했듯, 순일에게도 결혼은 절반은 독립이며 절반은 탈출 같은 것이었다. 순일은 평생에 걸쳐 일을 했고 가족을 지탱해야 했다. 남편과의 이해는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뤄지지도 못하였다. 딸 둘에 아들 하나, 세 아이를 두었으나 행복하고 만족스런 가정이라 하기에는 어딘지 미심쩍은 구석이 적잖다.순일의 오늘은 어떠한가. 첫째 한영진의 시댁 건물에 얹혀 살며 부부의 살림과 육아를 돕는다. 말이 돕는 것이지 식모생활이 따로 없다. 살뜰하긴 커녕 찬 바람만 쌩쌩 부는 사위의 눈치를 보는 신세다. 둘째딸 세진에게 이를 하소연하지만 뚜렷한 대안이랄 건 없다. 세진은 저 하나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상태, 수시로 언니 영진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는 한다.
소설은 순일을 비롯해 남편과 자식들의 이름을 세 글자 성명으로 그린다. 첫째와 둘째, 셋째라거나 남편이라는 말로 적는 대신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들 각자의 개체성과 독립성을 상기시킨다. 이름으로써 관계를 해체한 자리에서 도리어 진실한 관계가 그려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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