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EU 중견국 연대 눈여겨보는 이유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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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대…EU 중견국 연대 눈여겨보는 이유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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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지난달 우리나라 재정경제부와 유럽연합(EU) 경제금융총국 사이 열린 고위급 회의에 전문가 자격으로 참석했다. 미국의 통상 압력에 대한 양쪽 대응은 가장 뜨거운 논의 주제 중 하나였다. 한국과 유럽연합 모두 지

지난달 우리나라 재정경제부와 유럽연합 경제금융총국 사이 열린 고위급 회의에 전문가 자격으로 참석했다. 미국의 통상 압력에 대한 양쪽 대응은 가장 뜨거운 논의 주제 중 하나였다. 한국과 유럽연합 모두 지난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다소 굴욕적인 무역 합의를 맺었다. 상호관세와 주요 품목 관세를 낮추기 위해 한국은 10년간 3500억달러, 유럽연합은 2028년까지 6천억달러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합의 이후에도 미국과의 무역 관계는 위태로웠다. 올 초 유럽은 그린란드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한국은 대미 투자에 대한 국회 승인 지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10% 추가 관세 부과 압박을 받았다. 그런데 디테일을 보면 유럽연합의 대응은 한국과 사뭇 다르다. 우선 대미 투자 형식에서 차이가 난다. 유럽연합이 제시한 투자금 6천억달러는 정부가 재원을 조달하는 한국, 일본과 달리 유럽연합 기업들의 자발적인 민간 투자로 구성된다. 아무리 민간자금이어도 미국의 투자 압박이 있지 않냐고 회의에서 물었는데, 현재로선 그런 게 전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혹 미국이 상업적 합리성이 없는 무리한 투자를 강요한다면 유럽연합은 무역 합의 자체를 재고할 수도 있다고 강하게 얘기했다.그저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지난해 4월 미국의 첫 상호관세 부과 시도 때부터 유럽연합은 4800개 품목에 이르는 방대한 보복관세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 연초 그린란드 이슈가 불거지자 유럽연합은 보복관세를 다시 꺼내 들었고, 이에 더해 ‘무역 바주카포’라고 불리는 통상위협 대응조치까지 거론했다. 이 조치는 제3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응하여 투자 제한, 자본시장 접근 제한, 수출입 통제 등을 시행할 수 있도록 2023년에 마련된 규정인데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다. 원래 중국에 쓰려던 칼을 미국을 향해 꺼내 보인 데서 유럽의 분노가 느껴진다. 또한 유럽의회는 그린란드 사태 직후 한번, 미국 대법원에서 상호관세 무효 판결이 나온 다음 또 한번 무역 합의 승인 절차를 중단했다. 보복은 언감생심이고 관세 무효 판결에도 대미투자특별법 승인을 서두르는 한국과는 매우 다른 행보다. 이미 몇건의 투자 프로젝트 선정을 마친 일본과도 차이가 있다. 개인적으론 유럽연합의 비교적 강경한 대응에서 ‘중견국 연대’의 가능성을 엿봤다.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서 캐나다 마크 카니 총리는 흔들리는 국제규범 속 중견국 간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유럽연합은 중견국 연대의 명징한 사례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개별 국가들은 지금처럼 미국에 강하게 맞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발트 3국이나 몰타 같은 작은 회원국들도 유럽연합이란 우산 아래 통상 질서 변화의 파고를 헤쳐나가고 있다.물론 유럽연합도 미국과 완전히 대등한 관계는 아니다. 보복관세를 비롯한 여러 조치는 결국 시행되지 않았고, 미국의 근거 없는 관세 부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회의에서 내가 ‘유럽연합이 조금 더 버텨줬으면 우리나라도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자, 유럽연합 쪽은 우크라이나 전쟁 뒤 방위와 에너지 안보 문제로 미국과 엮여 있어 관계를 섣불리 끊을 수 없었다고 답했다. 유럽은 또한 최근 혁신 역량이 하락하면서 장기간 경제 회복이 지연되고 있으며, 역내 핵심 품목 시장에 침투하는 중국에 대한 경계도 늦출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유럽연합은 중견국 연대의 좋은 사례이면서도 그 연대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선결 과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첫째는 연대 내에서 국방과 핵심 산업 분야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전히 강대국에 핵심 역량을 의존하는 상황에서 중견국 간 연합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둘째는 미국 같은 무역적자국, 즉 물건을 사주는 나라가 있어야 물건을 파는 나라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이다. 구매력이 없는 국가 간 연합은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견국 연대에 참여하는 나라들은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와 적극적인 산업 정책으로 기술 혁신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생산성 확대와 소득 증대를 우선적으로 이뤄야 한다. 반세기 이상 세계 경제를 규정했던 규칙 기반 국제질서와 자유무역의 원칙은 이제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작동하는 중견국 연대’는 이 격변의 시대를 헤쳐갈 수 있는 유럽과 우리나라의 생존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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