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유산이 철거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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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아카데미극장과 경기실크부지를 지켜주세요

참 늦은 해후다. 애써 잊은 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세월의 골방에 숨어있던 기억 한 자락이 눈앞에 서 있듯 선명하다.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대여섯 살쯤 먹은 어린아이 시절. 보랏빛 반짝이 수놓은 비로드치마로 한껏 멋을 낸 엄마를 따라 오르던 언덕배기.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서있던 극장. 영화배우들이 그려진 간판과 양 옆으로 활짝 열 수 있는 문, 그 옆 붉은 글씨로 쓰인 매표소. 면사무소 가기 전 언덕에 있던 극장은 마을의 유일한 병원과 나란히 있었다.새 영화 간판이 극장 머리맡에 오르는 날이면 엄마는 여느 때보다 서둘러 일을 끝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재미있게 보고 와" 하고는 빙그레 미소로 배웅했다. 극장가는 날 만큼은 내가 엄마의 보호자였다. 영화가 끝나면 어두컴컴해지고 혼자 밤길을 걷기에는 다소 부담이 될 터, 일테면 난 호신용 딸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술래잡기도 하고 극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까르르 웃다가 도망가고 붙잡기를 반복하며 정신없이 놀았었다. 매점 아주머니가 공짜로 준 알사탕 하나씩 입에 물고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안을 빼고는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때를 떠올리다보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흐른다. 마주보며 웃다가 이유도 없이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고 갑작스레 가슴이 뛰기도 했던, 어찌 보면 참 잔망스러운 시절이었다.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그 시절, 병원집 오빠와의 추억을 생경스럽게 떠올린 건 원주아카데미극장 소식을 듣고 나서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극장 중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데, 철거 위기에 몰린 극장을 지키려는 시민들과 철거하려는 원주시가 맞서고 있다.

그때부터 약간의 내부수리를 거쳐 영화 대신 씨네콘서트, 음악공연 등이 열렸고 원주시민들의 문화 향유 공간이 됐다고 한다. 그 덕분에 문화관광체육부에서 30억 원, 강원도에서 9억 원 등 국비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고 건물 안전을 위한 리모델링과 함께 역사적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단다. 여주 경기실크도 1963년 설립됐다. 잠업이란 누에를 길러서 비단을 생산하는 고치를 생산하는 농사인데 당시 한국경제의 큰 축이었던 잠업과 비단을 생산하는 실크산업은 국책사업으로 추진될 만큼 대단했다. 뽕나무밭이 많았던 여주에는 양잠농가만 4천 가구가 넘고 종사하는 사람도 2만 여명이었다고 하니 그 시절, 지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경기제사공업주식회사 부설 경기잠업연구소로 설립된 이곳은 각종 실험기구와 채종기구 등 잠업 관련 모든 시설을 완비하고 일본산 기계에 의존하던 잠업 기계를 국산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역사도 갖고 있다. 잠업이 활황이던 시절에는 약 500여 톤의 누에고치를 생산해 경기도 내 최고 생산량을 자랑했던 여주 잠업 농가들은 광폭자동견직기 등 실크 생산설비를 모두 갖춘 이곳 덕에 농가소득이 상당했다고 한다.

여주 경기실크 또한 마찬가지다. 질 좋은 비단을 생산하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했던 연구원들과 그들의 연구 결과로 부농의 꿈을 이룬 잠업 농가들, 노동의 무게를 견디며 최고 품질의 비단을 생산했던 노동자들의 노고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숨은 공로자들이다. 경기실크는 비단 원단을 뽑아내는 누에고치처럼 잠업을 통해 농가소득을 올리고 지역 경제도 활성화 시킨 지역산업의 누에고치 같은 존재였다.낡았다고, 이제는 필요 없어졌다고 그냥 무너트리면 그만인 공간이 아니란 말이다. 두 곳 모두 헐어버리면 다시는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묻혀 만들 수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을 수도 없다. 그것을 외면하거나 정말 모른다면 지역을 이끌어가는 대표로서 자격이 없다. 그나마 원주아카데미극장은 '아카데미의 친구들'이란 시민모임이 주축이 돼 원주아카데미극장을 다시 시민들의 품으로 되돌리기 위해 다양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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