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이 | 자립준비청년 학창 시절, 장래희망을 적어내는 종이에 ‘결혼’이라고 썼던 기억이 있다. 가정을 이루면 보육원 생활로 생긴 내 결핍이 채워질 거라 생각했고, 온전히 내 결정으로 시작되는 새 인생을 책임감 있게 살아 보고 싶었다. 열아홉살에 보육원을 퇴소하고, 스
학창 시절, 장래희망을 적어내는 종이에 ‘결혼’이라고 썼던 기억이 있다. 가정을 이루면 보육원 생활로 생긴 내 결핍이 채워질 거라 생각했고, 온전히 내 결정으로 시작되는 새 인생을 책임감 있게 살아 보고 싶었다.
열아홉살에 보육원을 퇴소하고, 스물네살에 대학을 졸업한 뒤 나는 서둘러 결혼식을 준비했다. 직업을 정하고 경제활동을 해 보기도 했지만, 현재 나에게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더 시급하고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 준비는 쉽지 않았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혼주 자리는 누구에게 부탁할지 등 난감하고 모르는 것이 많아 허둥지둥하기만 했다. 결혼식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우리가 만들어갈 제2의 인생을 시작부터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식을 치르기로 한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나와 신랑은 우선 혼주를 부탁드릴 어른을 떠올려 보았다. 다행히 나에게는 후원자이자 마음으로 이어진 아빠가 계셔서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아빠는 내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식장을 꼼꼼히 둘러보시고 하객들을 위한 답례품과 버스 대절까지 신경 써주시며 혼주 역할을 해주셨다.
식장은 나와 신랑의 보육원 식구들, 그리고 혼주를 맡아준 어른들의 지인 등으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우리 계획대로 이상해 보이지 않는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가족사진 찍을게요!” 가족사진 촬영을 위해 단상으로 올라와달라는 사진작가의 큰 소리에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사정을 아는 지인들도 우물쭈물했다. 식전에 친구들에게 “가족, 친지 사진 촬영할 때 나와달라”고 미리 양해를 구했음에도 선뜻 나서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와 신랑은 큰 결혼식장 한가운데에 잠깐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그때 마음속에서 무언가 끓는 듯했다. 내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었을까? 나는 내 마음속에 있던 말을 꺼내어 외쳤다. “보육원 식구들 얼른 나와!” 순식간에 나와 신랑의 보육원 식구들이 가족의 자리를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느꼈던 것은 나 자신을 감추려 할수록 더 힘들어진다는 점이었다. 내 삶과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오히려 주변의 지지와 사랑이 더 크게 다가왔다. 자립준비청년들 중에 일생의 최대 이벤트이자 또 다른 시작인 결혼식을 준비하는 데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 눈치가 보이거나 기가 죽을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마주할 많은 시작들 앞에서 남의 시선이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과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한 결정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겐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저마다 빛나는 진짜 이야기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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