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아현동의 풍경 속에 남아 있는 잔치국수와 추억들. 과거의 흔적은 지워지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추억과 의미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이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된 잔치국수 한 그릇 먹어본 지 참 오래됐다. 유별난 고명도 필요 없다. 진하게 잘 우려낸 멸치육수에 잘 삶은 소면, 되직한 양념장 한 숟갈과 김가루면 충분하다. 거기에 지단 고명 살포시 올려주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고. 요식업의 화려한 발전과 함께 면식도 그 모양새가 달라졌다. 학교 앞 어묵국수 얼큰하게 끓여 나오던 단골집은 어느 날부터인가 국수에 커다란 갈비 한 덩이를 통으로 넣어주기 시작했다. 김가루니 지단이니 하는 쩨쩨한 고명으로는 승부가 나질 않았나 보다. 그렇다고 분식집 잔치국수 는 성에 차질 없다. 육수를 항시 끓여둘 것도 아니니, 그저 조미료 맛에 후루룩 넘기는 것이고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잘 끓인 한 그릇 국수가 주는 감동은 없다. 언젠가의 겨울, 선배 따라 집회에 나갔다. 철거민의 가게 앞 농성장에 놓인 드럼통 화로에 불을 놓아도 쉬이 따뜻해지질 않는다. 화로 위 주전자는 펄펄 끓는데, 손과 발은 한줌 온기를 붙잡겠다고 발발 떨고만 있는 그런 겨울.
집회가 끝나고 선배가 야식을 먹자며 건너편 아현동 포장마차 거리를 처음으로 데려갔다. 꼼장어, 주꾸미, 낙지 등 별별 음식 다 있지만, 이 집은 잔치국수가 제일이라며 국수 한 그릇만 곱배기를 시켜 주던 선배. 국수 한 그릇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입에 꽉 차도록 집어 들이민다. 그 짧은 새 겨울 한기가 면발을 식힌다. 호박 건더기가 면발에 걸려들어 온다. 목구멍이 막히도록 집어넣고는 국물을 들이마시며 몸을 덥혔던 제법 오래된 기억.그렇게 인연을 맺은 서울 아현포차 거리다.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저렴한 월세의 가난한 동네, 주머니 얇은 이들의 아지트였다. 대단지가 들어서며 아파트값 떨어진다는 소리에 민원 세례를 받게 됐고 그렇게 철거됐다. 아현동 곳곳이 같은 일을 겪어야 했다. 땅값 오른다는 소문은 무서운 속도로 현실이 된다. 보증금 300만원, 월세 25만원. 포장마차 거리에서 시장통 지나면 ‘아현 2지구’였다. 동네 주민인 박준경과 그의 어머니가 살던 집의 보증금과 월세였다. 2016년 박준경의 집과 그 주변에 관리처분 인가가 난다. 오래된 동네였고, 저렴한 집이었지만 보금자리였다. 의탁할 곳도, 새로이 집을 구할 돈도 없는 가난한 동네 재개발 철거민 보통의 삶은 그렇게 반대 투쟁에 나선다. 2018년 9월 그와 어머니는 강제집행 끝에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후 함께 투쟁했던 다른 주민의 집에서 투쟁을 이어가지만, 용역의 집요한 괴롭힘과 폭력 끝에 동절기 강제집행 금지 기준인 12월1일을 하루 앞둔 11월30일, 거리로 쫓겨난다. 그렇게 사흘을 헤매며 머물 곳을 찾지 못한 그는 유서를 남기고 12월2일 한강에 투신한다. 6년이 지났다. 가난했던 동네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아파트 단지가 우뚝 솟아있다. 열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작게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영문 모른 채 추모 공연을 보던 주민들이 마을 행사에 초대하고 싶다며 말을 건넨다. 포클레인에 말끔히 지워진 아현동 거리에 6년은 너무 긴 세월이었나 보다. 국수도 변했고, 아현동도 변했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되어 남은 이들을 추동하는 힘이 된다. 유독 겨울이면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추억한다. 그게 무엇이든 그저 떠나 보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을 세어보며 12월의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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