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때 할아버지 영면 김자동 김자동평전 김삼웅 기자
김가진은"대한제국 고관을 지낸 사람 가운데 독립운동에 투신한 유일한 인물" 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는 고종의 다섯 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임시정부 망명을 추진하여 복벽주의자 또는 보황주의자라는 평이 따르기도 했지만, 임시정부를 세계 각국에 각인시키고 국민적 활력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동농에 대해 특별히 대접하여 모두들 정성을 쏟기는 했으나, 살림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무총장 도산 안창호와 법무총장 예관 신규식 두 분이 크게 도와주었다. 이 두 사람은 동농이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장으로 있을 때 관계를 맺었던 분이다. 며느리가 와서 살림을 꾸려 나가자 손님들도 찾아들기 시작하였다. 이시영, 이동녕 같은 분들의 방문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할 여유가 있다는 것이 동농으로는 자랑스러웠다. 또 남들이 감히 생각 못하는 만리타국까지 찾아와 준 마음이 고마워, 손님들에게 며느리 자랑을 늘어놓기도 하였다.김가진은 1920년 1월 1일 임시정부 참여 두 해를 맞아 라는 시를 지었다. 대각의 여러 각료들은 모두가 준걸하고김가진은 국내에서 생사를 같이하기로 다짐했던 대동단 단원들이 일제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22년 3월 1일 이라는 시를 지었다. 원수를 잠시 잊었으나 끝내는 다시 그 생각이 살아나서김가진은 1921년 북간도 독립군의 무장투쟁 조직인 군정서로부터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주로 건너가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자 했으나 건강이 따르지 않아 미루고 있었다. 손자 김자동이 네 살이던 1922년 7월 4일 할아버지 김가진은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 박은식·이동녕·이시영·홍진·김인전·김철 등의 명의로 부고를 내고 요인 대부분이 문상을 하고, 상하이 대한교민단장 김철은 부고 통지서를 교민들에게 보내어 슬픔을 나누었다. 장례식에는 임시정부 수석 홍진과 안창호 등이 추도사를 하였다. 국내에도 서거 소식이 알려져 유림연합대회 주관으로 서울 적선동에서 추모집회가 열렸다 동농 선생 김가진씨는 우리 구한시대의 대관으로 내정개혁과 외교직임에 경력이 이미 많고 3.1독립운동이 발생하는 일에 다수 지사를 연락하여 찬조함이 있고 우리 독립당의 임시정부가 ○○에서 설립된 후에 씨가 광복사업에 잔명을 공헌할 사상으로 민국원년 8월에 아들 의한을 이끌고 상해에 도착함은 우리 일반사회가 성심환영한 바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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